1)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자수를 놓고 있는 양반집 규수가 등장
2) 학창 시절, 소소하게 불었던 십자수 열풍
'나는 자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구석구석 뒤져보니 위 2가지 정도로 추려지네요.
아마도 저를 포함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수를 미디어나 패션에서 봤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때문에 자수를 미술의 한 영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수 작품 하나, 작가 한 명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전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을 관람하며 깨달았습니다. 자수가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놓이면서 우리는 자수와 친해질 시간이 더욱 부족했어요. 최근 몇 년 간 다양한 회화, 설치 미술, 조각 등의 전시가 활발히 열린 것에 반해 '자수 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편협했던 사고를 부수라는 듯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전시되어 있는 자수는 어떤 경지에 이른 작품들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물감으로 그린 회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실들이 경계를 넘나들며 촘촘하게 엮여 있습니다.(개중엔 회화 작품도 존재합니다.) 적정 거리 안에서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봐야 해요. 그래야만 표면을 통과해 흔적을 남기고 다시 표면을 뚫고 나온 실의 궤적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1.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전시는 총 4개의 파트로 되어 있고 첫 번째 파트에는 생활 자수, 복식 자수, 감상 자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자수는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인류의 오랜 문화유산이지만 전시는 자수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보인 19세기 말부터 시작합니다.

<백화만발>(김종학, 1998)

<국화와 원앙>(박을복, 1937)

<자수 십장생도 병풍>

고관예복

글자도 자수. <자수 무이구곡시 병풍>

<자수 백동자도 병풍>
작지만 날카로운 바늘과 가느다랗지만 질긴 실의 힘은 첫 파트부터 강렬합니다. 실이 수놓아진 건 병풍, 옷감이건만 어쩐지 제 몸이 칭칭 감긴 것 같아요.
파트 1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감상 자수(병풍 자수)입니다. 자수가 감상의 대상으로 본격화된 조선 후기, 자수 병풍은 조형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이었고 회화에 채택된 소재들을 병풍에서도 등장했다고 하죠. 산수, 십장생도 등 회화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림들이 자수로 탄생을 달리해 은은한 핀 조명 아래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요. 오래된 작품들이다 보니 실 색이 주변으로 번져있기도 했지만 몇 백 년의 시간을 거쳐왔음에도 여전히 화려하고 입체감이 도드라집니다.

<자수준이종정도 병풍>

활옷 뒷면

수저집
생활 자수나 복식 자수를 볼 땐 영화 속 장면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천을 뚫는 바늘과 그 뒤를 따라 나아가는 실에 집중했을 여성들의 모습이 미디어 속 이미지를 토대로 머릿속에 펼쳐졌어요.
무엇보다 이 전시에선 '규방 자수'라 불릴 만큼 한정된 신분에서 행해졌던 자수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 여성의 참여가 많아지고 여성 예인, 자수장이 탄생하는 흐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류 미술사 관심 밖에 놓여있던 자수와 밀려오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늘을 들었을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깊은 전시이기도 합니다.
2. 그림 갓흔 자수
파트 2에서는 미술공예로 거듭난 자수의 변화를 그립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자수는 여성 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되면서 적지 않은 수의 여성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를 전공하기 시작해요. 때문에 2 전시실에는 유학생들의 작품과 그들에게 지도 받았던 조선 여학생들의 작품을 조명하고 자수뿐만 아니라 밑그림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바늘과 실로 이뤄낸 작가들의 솜씨와 재능, 그리고 노력을 발견할 수 있는 파트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그리고 파트 2 주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시기 자수는 사생(寫生)을 바탕으로 한 회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통 사회에서 사적(私的)으로 제작, 향유되던 자수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공교육과 전시를 통해 공적(公的) 영역으로 이동하면서 근대화된 자수는 이 과정에서 순수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자수 특유의 공예적 특성 포기하고 회화의 조형언어를 내재화했습니다.*
*출처: 젠더 관점에서 20세기 한국자수 고찰(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박혜성, 2023), https://www.kjah.org/journal/view.php?number=1913&viewtype=pubreader

<등꽃 아래 공작>(숙명여고보생 공동 제작, 1939)

<자수 공작도 가리개>(사립여자미술학교생 공동 제작, 1914)

<자수 화조도 병풍>(향상여자기예학교생 공동 제작, 1932)


<해금강>(대구 공립여고보생 공동 제작, 1931)
이처럼 자수가 회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작품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요. 나사균 <해금강>, 진명자 <성모>, 대구 공립여고보생 공동 제작 <해금강> 등 그림인지 자수인지 확인하려면 유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작품이 꽤 많았습니다. 굽이치는 물길,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 부드러운 새의 깃털, 햇빛에 반사된 수면 위 윤슬까지 표현한 전문가들의 솜씨가 정교해요.
작품 중 다이쇼기의 <수박과 포도>, <폭포>를 보고 있을 때 미술관 관계자가 업무를 하기 위해 근처로 오셨는데요. 다이쇼기는 사실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말 그대로였습니다. 다이쇼기의 작품을 비롯해 위에서 언급한 작품 모두 섬세함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저는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 이 작품이 회화인지 자수인지 혼자 유추한 다음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재미로 이 파트를 즐겼어요.
3. 우주를 수건繡巾 삼아
3 전시실에는 광복 후 국가 재건과 조국 근대화가 사회적으로 화두 됐던 시기에 자수가 어떤 형태로 변화했는지를 담았습니다. 이 시기 자수는 추상화와 전통의 부활이란 형태로 전개되는데 전자는 아카데미 안에서, 후자는 그 밖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요. 3번째 파트에선 아카데미 안팎에서 탄생된 자수를 살피고, 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추상으로 나아간 1960년대 작품까지 다룹니다.


<대청봉>(엄정윤, 1980년대)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최유현, 1968)


<작품 0-3>(송정인, 1973)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이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언어로써 세계적으로 동시대성을 획득하여 다양한 미술 분야에 영향을 미쳤고 공예 분야 역시 그 대세에 탑승한 것을 보면 회화의 경향에 자수가 함께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파트 2에서 봤던 자수와 회화의 밀접한 관계가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듯했습니다. 무엇보다 파트 3에서는 자수로 추상화, 즉 '한국적 큐비즘'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될 거예요.
이 파트에는 전시 타이틀이기도 한 최유현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도 걸려 있습니다. 새의 형태를 발견할 순 없지만 진짜 깃털을 캔버스 위에 붙인 듯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져요. 태양 근처로 가버리면 다 타버릴 것만 같아 지레 아쉬움이 들 정도로 실크 같은 부드러움을 눈으로도 만질 수 있습니다. 또 정필순의 <작품1977>, <산> 같은 작품에선 엠보싱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이런 질감까지도 한국적 큐비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왼) <봄 숲>(강신희, 2020) / (오) <드러남: 사물의 파토스)(강신희, 2020)

<사각_프리즘 2>(최수정, 2023)


지금껏 봤던 자수는 대개 질서정연했습니다. 파트 2에서 이미 보고 왔듯이 그림이라고 착각할 만큼 부드럽고 실과 실 사이가 촘촘해 마치 하나의 두꺼운 실처럼 보일 정도로 연속성을 지닙니다. 하지만 기하학적 무늬를 그린 자수는 거침없이 경계를 넘나들고 표현의 한계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캔버스 위에 물감과 자수가 함께 놓여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작품도 있었고요. 자수가 작가에 따라 수십, 수백, 수만 가지의 방법으로 확장되면서 자수를 보는 제 시야도 따라서 확장됩니다.
또 현대로 올수록 자수를 놓는 캔버스가 다양해지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예컨대 강신희의 <봄 숲>은 담요에 자수를 둔 작품이고 벨벳에도 자수를 둘 수 있더라고요.
4. 전통미의 현대화
앞서 많은 이들이 추상 자수 실험을 시도했지만 자수는 아카데미 내에서 점점 퇴조하게 됩니다. 반면 아카데미 밖에서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산업 공예로, 보존·계승해야 할 전통 공예로 부각되는 상반된 길을 걷습니다. 이때 동양자수, 즉 전통자수가 관광상품이자 주요 수출 품목으로 떠오릅니다.
80년대 이후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점점 일상에서도 밀려나게 되지만 남은 이들의 자수에 대한 사그라지지 않은 불씨는 자수의 수집과 연구, 전시로 이어졌습니다.

벨벳에 자수. <연화도>(이인선, 2020)

<통일(무궁화)>(정영양, 1968)
특히 1984년에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어 유·무형 문화재가 국가적 보호 대상으로 규정된 지 20여 년 만에 자수장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요.
파트 4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 한상수, 최유현의 작품을 집중 조명합니다. 수공과 공예의 가치를 재고하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전통자수의 계승 및 현대화에 대한 신념을 지닌 자수장들 덕분에 자수의 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업적은 큰 공간에 할애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탄과 영감을 선사하고, 자수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널리 퍼뜨립니다.

(왼) <궁중자수 모란도 병풍>(한상수, 1978) / (오) <궁중자수 봉황도 병풍>(한상수, 1994)

한상수 자수장이 사용하던 재료와 도구

<궁중자수 꽃담문>(한상수, 1987)



<팔상도>(최유현, 1987-1997)
이 파트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유현 <팔상도>입니다.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8점의 <팔상도>는 그림이라고 해도 놀라울 텐데 자수입니다. 색색의 실은 사람이 되기도, 구름이 되기도, 산수가 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공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하나하나 봐야 그 압도적인 스케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작품이 저에게로 쏟아지는 것 같거든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우리는 일상에서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의복 속 자수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아요. 자수 작품을 오랫동안 볼 수 있다는 점, 자수의 다양성을 깨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는 자수에 대한 생각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전시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수 작품은 온·습도와 조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전시실 내부가 꽤 어두워요. 관람하실 때 넘어지거나 벽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시고 2, 3층에 걸쳐 4개의 전시실을 오가기 때문에 중간중간 쉬면서 방금 봤던 작품을 곱씹어 봐도 좋을 거예요.
· 전시 기간: 24.05.01.(수)~24.08.04.(일)
-화, 목, 금, 일 10:00~18:00
-수, 토 10:00~21:00
-월요일 휴관
· 위치: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내 위치)
· 관람료: 2,000원
-인터넷 사전 예매/현장 예매
-덕수궁 입장료(1,000원) 별도 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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