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역 계단 올라가는데 네 향수 냄새가 나는 거야. 설마 했는데 네가 앞에 가고 있더라고.”
제가 실제로 들은 말입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신사역 8번 출구에서 익숙한 향을 맡아 앞을 봤더니 제 뒷모습이 보였다고 해요. 저는 데일리 향수로 3년째 르 라보 어나더 13을 사용 중입니다.(가격 상승 멈춰..!)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서 나는 어나더 향을 익숙하다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인 것이죠.
어나더 향을 맡은 지인 중 한 명은 향이 마음에 든다며 똑같은 향수를 구매했습니다. 그러나 착향을 하고 보니 본인과 어울리지 않고 생각보다 가죽 향이 강하게 나 두어 번 사용 후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있어요. 모든 향 제품이 그러하지만 유독 향수는 향에 있어 호불호가 강하게 나타나는 제품입니다.
저처럼 잘 맞아 몇 년째 쓰다 보면 향으로 제 존재가 기억되기도 하는 반면 서랍장 행이나 중고 마켓 행을 면치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같은 향인데도 사람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일이 문득 신기하다고 생각돼 자리를 하나 마련했습니다. 전문 지식은 적지만 향수를 모을 만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데일리 향수를 시향하고 감상하는 시간을요.

ⓒ르 라보 공식 홈페이지
르 라보 어나더 13(LE LABO ANOTHER 13)
30ml 310,000원
"뇌쇄적이면서도 유니크한 암브록스 베이스 머스크 노트의 중독성 강한 묘약에 재스민, 모스 등 세심하게 선정된 성분들로 강렬함과 매혹을 더해 구성됩니다."(르 라보 공식 홈페이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려 간택 향수라는 별칭까지 있는 르 라보 어나더 13. 후기를 봐도 잘 맞는 이들에겐 인생 향수지만 아닌 사람들에겐 극불호의 끝입니다.
처음엔 금속 향, 가죽 향의 강렬한 존재감에 멈칫하게 됩니다. 암브록스(Ambrox, 암브록산(Ambroxan)이라고도 함) 향료가 매캐함과 스파이시함을 내뿜어 첫 향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운 머스크 향을 남겨요.(베이비파우더 머스크 향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워낙 첫 향이 강하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채취에 따라 향이 달리 느껴지는 경우가 있으니 꼭 착향 후 구매할 것을 추천합니다. 이때 시향지가 아니라 평소 향수를 자주 뿌리는 부위에 분사 후 잔향을 맡아보세요.
GOOD
· 매캐한 첫 향과는 달리 은은한 머스크 잔향이 매력적인 반전 있는 향수.
"머리가 띵 할만큼 향이 강하다. 과장 조금 넣어 이 향수를 쓰는 날이면 사람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정도다. 그리고 지속력이 좋다."
BAD
· 신경을 짜릿하게 하는 금속성 향. 머스크 향수를 기대했다가는 날카로운 쇠 향과 마주할 수도.
"머스크나 우디 계열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도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는 향을 가졌다. 살성을 탄다고 하는데 이 자체가 난도 높은 향수라는 뜻 같다. 반드시 몸에 뿌린 후 향을 확인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중고 마켓에 내놓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RboW 공식 홈페이지
알보우 앰버 생귄(RboW AMBER SANGUINE)
30ml 68,000원
탑 노트: 핑크 베리, 베르가못, 블랙 커런트
미들 노트: 바이올렛(제비꽃), 오리스(흰붓꽃), 은방울꽃
바텀 노트: 모스(이끼), 캐쉬머랜, 슈가 아몬드, 오카녹스, 앰브라몬
한동안 니치 향수를 쓰다가 알보우 앰버 생귄을 만났을 때 패션 향수와 오랜만에 조우한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익숙함에서 오는 반가움. 페라가모 인칸토 참이 연상되기도 했는데, 인칸토 참에 비해서는 조금 덜 달고 머스크가 스며든 향입니다.
탑 노트가 베리와 베르가못인 향수답게 첫 향은 달달해요. 숨을 깊게 들이쉬어야만 코 끝에 머스크 향이 톡 치고 지나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 베리 향 위로 머스크가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어느 순간 쌉싸름한 달콤함을 느낄 수 있어요. 이 쌉싸름한 달콤함이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미들 노트에 꽃이 있는데 꽃향기는 미미해요.
GOOD
· 베리와 머스크 향이 각각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단 조화롭게 어우러져 부담 없이 뿌리기에 좋은 데일리 향수.
"자두 사탕을 먹으면서 머스크 향이 10% 첨가된 보디로션을 바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향수. 보통 베리류는 향이 빨리 사라지는데 앰버 생귄은 꽤 오래 지속되는 편이다."
BAD
· 대중적인 향. 독특한 향을 찾는 사람들에겐 무난하게 느껴질 향수.
"입문자 용으로 좋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향이지만 그만큼 특색을 찾기엔 무난해 아쉬움이 느껴질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수 향보다는 화장품 향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쉬운 점."

ⓒ엉트르두 공식 홈페이지
엉트르두 비터 비테(ENTRE D'EUX BITTER VITAE)
50ml 156,000원
"가이악 우드의 짙은 우디 노트, 바닐라의 달콤함, 재스민과 앰버의 감미로운 여운"(엉트르두 공식 홈페이지)
특이하게도 물 향이 납니다. 물 비린내는 아니지만 히노키가 연상되는, 하지만 히노키 향을 앞세운 향수와는 또 다릅니다. 한편으론 흙냄새 같기도 해요.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나는 싱그러운 흙냄새. 가이악 우드의 스모키 향은 초반에는 옅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야 짙게 올라옵니다.
바닐라 향 역시 첫 향이 어느 정도 사라져야 피어올라요. 그래서 첫 향은 애매하다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해지는 스모키 향, 바닐라 향이 인상적입니다. 잔향 대부분이 스모키+바닐라 향입니다.
GOOD
· 향기 입자에 단어를 붙일 수 있다면 비터 비테는 '따뜻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디, 바닐라 계열이라 겨울에 쓰면 포근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포근하지만 무겁지 않아 겨울에 데일리로 사용하고 있는 향수. 지속력도 좋은 편이다."
BAD
· 사람에 따라 맵싸하다 느껴지는 스모키 향. 스모키+바닐라 향이 적절히 어우러지지만 그럼에도 스모키가 어쩔 수 없이 강렬하다.
"지속력이 좋지만 계속 맡고 있다 보면 머리가 어지러운 향이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분사했을 때 나는 흙냄새가 독특하다 느꼈는데 금방 사라지는 점이 아쉬웠다."

메종 마르지엘라 바이 더 파이어플레이스(Maison Margiela By the Fireplace)
30ml 108,000원
따뜻하고 스파이시한 향
-체스넛 어코드: 벽난로 옆 중독성 있는 향
-캐쉬머랜: 장작이 타는 따뜻한 향기 연출
-클로브 어코드: 따뜻한 느낌과 함께 매콤하고 스모키한 향
(메종 마르지엘라 공식 홈페이지)
이름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따뜻한 느낌.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벽난로 혹은 모닥불을 연상케 하는 메종 마르지엘라 바이 더 파이어플레이스는 예상과 달리 첫 향이 매우 달아요. 스모키 향을 예상하고 구매했다면 잘못 샀다고 생각될 수 있을 만큼 달콤한 향입니다. 하지만 달콤한 향이 날아가고 남은 자리는 부드럽습니다. 이름처럼 나무나 장작 냄새는 아니지만 겨울에 따뜻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사용하면 좋은 향수입니다.
GOOD
· 예상치 못한 달콤함이 주는 반가움과 기분 좋음. 부드러운 잔향이 겨울과 잘 어울린다.
"생각지도 않았던 달달한 향에 당황했지만 단 향수도 좋아해 일석이조라고 생각하며 사용하고 있어요. 봄,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에 쓰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BAD
· 장작을 떠올리며 스파이시나 우디 향을 기대했다면 비추천. 이름에 혹하지 마시길.
"너무 달아요. 현기증이 날 정도로요. 마치 바닐라 시럽을 쏟은 것 같아요. 스모키 향은 거의 없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평소 달콤한 향수를 즐겨 쓰고 (미세하지만) 스모키 향에 거부감이 없다면 도전해 볼 만한 향수에요."

ⓒS.I.VILLAGE 공식 홈페이지
딥티크 도손(DIPTYQUE DOSON)
50ml 176,000원
메인 노트: 투베로즈, 재스민, 오렌지 블로섬
히든 노트: 돌발적 향기-마린 어코드
(S.I.VILLAGE 공식 홈페이지)
플로럴 향수로 유명한 딥티크 도손. 꽃향기에 비누 향(머스크 향이 연하고 무난해 비누 향처럼 느껴지는 듯해요.)이 섞여 중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성별 구분 없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향수이기도 합니다. 또 플로럴 계열이지만 의외로 산뜻한 향수에요. 소개했던 향수 중에 상대적으로 호불호가 적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딥티크 향수 패키지엔 향수와 연관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데 도손은 베트남 사원입니다. 딥티크 창시자 중 한 명인 이브 쿠에랑이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만든 향이 도손인데, 이브 쿠에랑이 어렸을 때 자란 곳이 베트남 하이퐁이라고 하네요.
GOOD
· 계절을 크게 타지 않아 어떤 룩에도 잘 어울리는 플로럴 계열 대표 향수. 잔향으로 따라오는 머스크도 무난해서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니치 향수 브랜드 중 진입 장벽이 낮은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플로럴 향수를 즐겨 쓰지 않는데도 도손은 은은하게 플라워리 해서 손이 자주 가요."
BAD
· 독특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니치 브랜드 향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겐 무난한 제품. 오 드 퍼퓸인데 지속력이 약하다.
"니치 향수 중에 현관 컷 제품들이 있어요. 뿌리는 순간 향이 휘발되는 향수가 꽤 많은데, 딥티크 제품도 지속력이 아쉬웠습니다. 신기한 건 지속력이 낮은데 미세하게 향이 제 주위에서 부유하는 느낌이에요."

같은 향수를 뿌렸는데도 느끼는 바가 천차만별이죠? 향수를 사기 전에 꼭 시·착향을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요즘엔 브랜드 매장뿐만 아니라 향수 편집숍에서도 다양한 패션/니치 향수를 시·착향 할 수 있어요. S매거진에서도 소개했던 혜화의 퍼퓸그라피도 있고요, 여러 지점을 둔 니치 향수 편집숍 리퀴드 퍼퓸 바, 퍼퓸갤러리도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입니다. 공기와 온도에 따라, 분위기 전환으로 향수를 바꾸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여러 제품을 거치면서 내 취향을 찾는 일도 꽤 재미있습니다. 비슷한 향료로 만들어진 제품일지라도 조향사의 손길 한끗 차이로 취향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벗어날 수도 있는 그 배합이요.
여러분의 향수 취향은 어떠세요?
본 콘텐츠는 저작권에 의해 보호됩니다. 복제, 배포, 수정 또는 상업적 이용은 소유자의 허가 없이 금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