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폐허를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꼭 한 번 들어가서 둘러봐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래도 몰랐습니다. 폐허를 좋아하는 취향이 있으리라고는. 어느 날, 촬영을 위해 로케를 고민하고 있는데, 동료가 지나다가 한 마디 툭 던집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폐허로 가던지요?”
“응? 내가 폐허를 좋아했었어?” 물었더니, 의아하다는 듯이 찡그리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 사실을 제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전에 작업했던 이미지들 몇 개를 훑어보니 유독 폐허 현장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세트장에서 폐허를 재현하여 작업한 것도 눈에 띕니다.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전 폐허를 좋아합니다.”

몇몇 정보들을 찾아보니 ‘폐허 마니아’들은 세상에 참 많고, 폐허를 좋아하는 심리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방법에 대한 내용도 보입니다. 취향을 인정하자마자 간단하게 요약/정리가 되려니 어쩐지 입맛이 씁쓸합니다. 정보를 추려보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직접 가서 사진도 찍어 보고, 글도 써보고, 기록도 해가며 직접 취향을 정의해보기로 했습니다. ‘Liminal space project’라는 거창한 이름도 붙였죠.
당장에 어디서 그럴싸한 폐허를 본 적이 있어? 라며 주위를 수소문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술자리에서 ‘한적한 포구 근처,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폐허’에 관한 귀가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쪽 끝에 있는 포구 근처에 가면 우뚝 솟은 폐건물이 하나가 있는데, 엄청 크고 특이하게 생겼어. 몇 년째 그대로인데 대체 뭐 하려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들어가 보고 싶게 생겼더라고.”


전해 들은 대로 길을 찾아 나서 봅니다. 지독한 길치이자 방향치인지라 이런 식으로 한정된 정보로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이미 그 시작부터 모험이 시작되는 것인데, 의외로 허무하게 그 서쪽 끝 포구가 가는 길에 떡 하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돔 형태의 지붕을 가진 건물은 그 돔을 반원의 형태로 감싸며, 안으로는 정원을 품고, 밖으로는 바다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규모가 상당하여 건물의 가장자리로 진입하면, 꽤 걸어야 중앙 본관에 다다를 수 있는데, 중앙 본관에서 2층으로 이르는 나선형 돌계단과 돔 형태의 지붕이 나타나며 시야가 트입니다. 계단 중간에 1층 식당/2층 휴게실이라는 글자 가운데 ‘ㅎ’가 빠진 모습은 어쩐지 드라마틱합니다.


곳곳에는 식물들이 녹색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데, 밖에서 추적거리며 내리는 빗방울에 반사된 빛들 덕분에 어쩐지 싱그럽게 느껴집니다. 머리 위로 새가 스쳐 지나갑니다. 고개를 잔뜩 움츠리고 천장을 둘러보니 곳곳에 제비집이 지어져 있는데, 어쩐지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입니다.
이곳을 찾으며 챙긴 렌즈는 자이스의 밀부스 25mm f/1.4입니다. 일을 하기 위해 렌즈를 챙길 때면 필요도 없는 렌즈까지 꾸역꾸역 챙기는 버릇이 있는데, 사진을 찍으러 나설 때면 의도적으로 렌즈를 최소화해서 한 렌즈만 챙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어진 화각 안에서 담을 수 있는 이미지를 최대한 고민해 보고, 시도해 보며 촬영하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죠. 선택 장애가 있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자신에게 내린 어쩌면 최적의 처방이기도 하고요.


자이스에는 비슷한 화각의 오투스 28mm f/1.4란 괴물과 같은 엄청난 성능의 렌즈가 있는데, 실제로 필드에서의 편의성 면에서 밀부스 25mm f/1.4가 우세한 데다가 이미 밀부스도 자이스의 주력 고급 렌즈 라인업인 만큼 괴물의 범주에 들어가는 성능을 보여줍니다.(오투스는 ‘초고성능’이지, ‘주력’은 아닙니다만) 게다가 25mm라는 화각은 자이스 렌즈에서만 쓸 수 있는 유니크한 설정입니다.
넓은 규모에 복잡한 구조물들이 있는 편은 아니기에 광각 렌즈의 활용도가 높고, 밀부스 25mm f/1.4의 경우 왜곡이 적은 렌즈인 만큼 내부의 모습을 담기에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습니다.
건물의 바깥면으로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투명한 창이 길게 건물을 두를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구와 바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섬까지 바다에서 느낄 수 이상적인 풍경이 파노라마(비유적 표현이 아닌 진짜 파노라마 형식처럼 긴)처럼 펼쳐져 있는데, 안에 앉아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눈을 감고 잠시 상상을 해봅니다. 어쩐지 저기 멀리서 페티 페이지의 ‘Old Cape Cod’가 텅 빈 공간 여기저기에 부딪혀 울리며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If you like the taste of a lobster stew
Served by a window with an ocean view
You're sure to fall in love with Old Cape Cod
창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랍스터 스튜를 맛보길 원한다면
올드 케이프 코드가 분명 마음에 들 거예요 ‘




안쪽으로는 빨간 벽돌로 꾸며진 정원에 아무렇게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마음대로 뻗어 나가고 자라난 식물들이 더 신비한 느낌을 주는데, 군데군데 보이는 얼굴이 커다란 붉은색의 꽃을 가까이 가서 보니 ‘아마릴리스’입니다. 아마릴리스는 신부의 부케에 많이 사용하는 고급 꽃인지라 이렇게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본 적이 없습니다.
본래의 목적을 가늠하기 힘든 이유는 워낙 구조가 특이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된 것이 아니라 건물이 지어지다가 말았기 때문입니다. 완성이 되었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을까? 지금은 식물과 새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 이 폐허가 언제까지 이 인적이 드문 바닷가 근처에서 이 모습을 하고 있을 수 있을까? 를 생각하니 어쩐지 폐허 기행의 한 발자국을 디딘 지금에서 폐허를 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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