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여름이 지나갑니다. 여름의 한복판에서는 지긋지긋한 더위라며 어서 시원한 가을이 오길 바란다고 바득거렸건만, 막상 코끝에 찬바람이 맺히자 아쉽습니다. 이젠 누구도 들어갈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마당에 펼쳐 둔 간이 수영장 물을 아직도 유리창처럼 맑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를 닮은 진한 갈색의 긴 바지를 하나 사 왔습니다. 반바지를 벗고 처음 입은 날, 수영장에 정수기를 틀고, 소독약을 풀다가 소독약이 녹은 물방울 몇 방울이 떨어졌는데 순식간에 염색이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집착하던 여름을 놓아주지 못한 벌이죠.

해야 할 일들은 밀렸는데, 가을을 인정했더니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집니다. 외출을 했다가 한적한 낯선 마을에서 잠시 시간이 남았습니다. 신중히 커피 한 잔 마실 곳을 고릅니다. 가장 신중한 포인트는 날 좋은 가을 오후, 덩치 큰 남자 혼자 여성향의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져 커피를 홀짝거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른 곳은 카페 ‘작은 방’. 막상 앞에 도착했더니 낡은 건물의 2층입니다. 암만 봐도 카페가 있을 것 같은 외관은 아닌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대문에 ‘커피, 2F’라고 아무렇지 않게 글자가 붙어 있습니다. 제 첫 직장은 미로처럼 얽힌 을지로 인쇄 골목 한복판, 작은 건물 3층에 있던 작은 잡지사였습니다. 아래 2층에는 ‘솔다방’이라는 아무도 가지 않는 낡은 다방 하나가 있었는데, 그 솔다방도 지금 이 카페보다는 입구가 화려할 것 같습니다(현재의 그 골목과 건물은 핫한 젊은이들이 오가는 곳이 되었습니다만).

2층에 올라 올록볼록한 유리가 붙어있는 오래된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가자 바로 바가 나오고 바 안의 남자 주인장이 인사를 건넵니다.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고 둘러보자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입구의 바를 중심으로 벽 쪽으로 몇 개의 크고 작은 테이블을 놓아둔 구조입니다. 벽을 따라 길게 난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뉘어져 안을 비춥니다.

구석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가서 자리를 잡습니다. 의자를 이루고 있는 은색 금속 테두리에 해가 반사되어 반짝입니다. 읽지도 않는 책을 두 권이나 넣어둔 가방을 두고 바 앞으로 돌아가 메뉴판을 살펴봅니다. 다시 살펴보니 바는 오래된 가구와 테이블 냉장고 등을 활용하여 바처럼 활용하고 있습니다. 투박한 듯, 정갈하고, 실용적인 활용법이 재미있습니다. 메뉴는 많지 않은데 그 구성이 참 재미있습니다. 시그니처 커피라는 작은방라테와 카페오레, 카페라테, 그리고 핸드드립(은 사실 일본식 콩글리쉬이니 브루잉) 커피가 전부입니다.
우유에 커피를 섞는 카페라테와 카페오레는 언어만 다르고 비슷한 것 같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우유를 넣어서 마시는 카페라테는 이탈리아식 커피이고,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았던 탓에 브루잉 커피와 우유를 섞었기에 카페오레는 프랑스식 커피입니다. 아메리카노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럴 바에는 브루잉 커피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장님 고집 좀 있네?’라고 생각하고 바 안을 보니 핸드드립 그라인더는 ‘말코닉(Mahlkönig, 정확한 발음은 말쾨닉인가요?)’의 베스트셀러인 EK43입니다. 직접 생두를 로스팅하는 로스터리는 아니지만, 브루잉이 자신 있다는 이야기죠.

작은 가정용처럼 보이는 에스프레소 머신은 ‘라 마르조꼬(La Marzocco)’의 리네아(Linea) 미니 1그룹 버전입니다. 작더라도 라 마르조꼬의 근본과도 같은 리네아의 이름을 딴 만큼 신뢰할 만하죠. 시그니처 커피인 작은방라테에 쓰일 에스프레소를 뽑겠다는 의도일 텐데, 이런저런 것들이 섞인 것 같은 커피가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혹시 단 한 잔을 추천한다면 작은방라테와 핸드드립 가운데 어떤 커피를 추천하실 건가요?”라고 묻자, 그런 질문이 많지는 않았던 것인지 남자 사장은 고민을 하더니 “핸드드립으로 드시죠. 종류는 4종류이고, 약배전 두 종류, 강배전 두 종류입니다.”라고 합니다.
전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1 워시드를 주문했습니다. 과일과 같은 산미가 차갑게 마시면 좋을 것 같은 원두이지만, 가을의 초입에 따뜻한 커피에서 올라오는 상큼한 향미가 더 궁금합니다. 이제 차가운 커피에서 느껴지는 과한 산미는 다소 부담스러운 계절인 것입니다.

커피를 내리는 드리퍼는 하단부가 낯설게 생겼는데, 리브의 형태가 ‘하리오(Hario)’의 제품으로 보입니다. 추출 시간이 빠른 하리오를 남자 주인장은 3번에 걸쳐 짧게 끊어냅니다. 한 번 맛을 보고, 뜨거운 물을 담아 두어 따뜻하게 데워 둔 잔에 담아냅니다. 데워 두지 않은 잔에 커피를 담으면 커피는 빠르게 식어버려 따뜻한 커피에서 느낄 수 있는 플레이버가 빠르게 사라져 버립니다. 하얀색 불투명의 잔은 콘셉트에 맞게 빈티지하지만 올드하진 않고, 온도를 지키기에 충분히 도톰합니다.
’음, 잘 내렸군.’

커피를 입안에 머금고는 입구의 책꽂이에 가봅니다. 마침 절묘하게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이석원 작가의 『보통의 존재』가 놓여있습니다. 그의 감성에 동화되어 센치해지기엔 창밖의 볕이 너무 좋은데, 어쩐지 또 그 감성이 지금 이 카페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와 몇 장을 읽어봅니다.


사생활의 주요 거점은 아무래도 집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집이 아무리 남루하고 누추하다 해도 피로에 지쳐 들어선 순간 느껴지는 안도감과 편안함은 언제나 ‘내 집이 최고’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내 집은 정말로 최고다. 편하기 때문이다. - 이석원, 『보통의 존재』 발췌
이 카페가 문득 작은방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주인장은 조금은 투박하지만 귀여운 편안한 자신의 작은방에 손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내부에는 연인 둘, 여자 커플 둘, 여자 한 명, 남자 나 한 명이 전부이고 만석입니다. 책을 덮고는 다시 꽂아 두러 가는 길에 남자 주인장에게 슬그머니 물었습니다.

“왜 핸드드립 커피를 추천한 거예요?”
“사용하는 4가지 원두는 모두 다른 곳에서 가지고 와요. 섬에서 전국의 커피를 마실 수 있으면 좋잖아요.”
“일반적으로 카페가 있을 곳은 아닌데, 여기는 어떻게?”
“여기 처음 들어왔는데, 저 촌스러운 격자무늬의 창이 사방을 둘러싼 모습을 보고 어쩐지 여기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살이 끊이지 않고 안으로 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즐거워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여자 주인장은 여전히 분주합니다. 커피는 남자 주인장의 몫이고, 커피 이외의 메뉴와 디저트는 여자 주인장의 몫인 것 같습니다. 밤이 올라간 깨끗하고 정갈한 모양의 빙수가 무척 궁금합니다. 하얀 우유 거품을 올린 시그니처 커피인 작은방라테도 궁금합니다.

다음 날, 전 결국 이 카페를 다시 찾아 전부 맛봤습니다. (웃음).
사용 장비 ㅣ 시그마 fp + 자이스 Otus 55mm f/1.4, 펜탁스 17
*이 콘텐츠의 디지털 이미지는 ‘Dehancer’ 필름 플러그인으로 효과를 낸 것이니 촬영 장비의 광학적 특성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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