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부터 살던 동네에는 작은 발전소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의 난방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던 그 발전소의 굴뚝은 꽤 우뚝 솟아있었습니다. 그 굴뚝으로 항상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곤 했는데, 그래서인가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그 굴뚝이 항상 그려집니다. 덕분에 굴뚝에 묘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골 마을의 목욕탕 굴뚝부터 발전소의 굴뚝, 심지어는 대형 산단의 수많은 굴뚝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곤 하는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밥 짓는 향기가 마을에 가득 차기 시작한다.’ 같은 옛 소설에서 봤을 것 같은 문구의 아련한 향수는 아니지만, 산업화된 현대 도시를 살아온 이들에게도 굴뚝에 대한 아련함이 있는 것을 보면 굴뚝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기묘한 공통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찾아간 폐허는 무성한 수풀로 담장이 가려진 데다가 위치마저 홀로 떨어져 있어 나무 사이로 솟은 굴뚝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 여기에 굴뚝이 있지?’라는 생각을 하며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서야 발견한 폐허입니다. 폐허는 크고 반듯한 건축물이 있고 주변에 굴뚝과 부속 건물이 있는 구조였는데, 헐거운 판넬로 얼기설기 엮어있는 것을 보니 정밀한 기계를 만들어내는 공장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텅 비어 있는 내부에 어떤 기계들이 있었을지 전혀 가늠이 되진 않지만, 거대한 입구와 높은 천장을 보니 꽤 큰 트럭들도 내부까지 오고 갔을 것 같습니다. 굴뚝이 본 건물과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굴뚝이 있는 건물은 폐기물을 처리하는 용도였을 것이고, 본 건물은 아마도 재활용 자원을 처리하던 곳이 아닐까 하며 상상 회로에 전원을 넣어봅니다.

네모 반듯한 거대한 건물은 내부가 텅 비어 있고, 조명이 없어 어두침침해 다소 심심하게 보인다는 것이 첫인상이었습니다. 눈이 어둠에 적응을 하자 삭막해 보이던 철제 판넬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보이며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구멍이 뚫리고, 휘고, 벌어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그렸습니다. 가뜩이나 직선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주로 사용된 소재마저 골이 직선으로 나있는 판넬이었던지라 삭막한 직선만이 가득했는데, 건물 속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 직선의 규칙성을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하자 어쩐지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사용한 렌즈는 Zeiss의 Milvus 25mm f/1.4입니다. 굴뚝을 보고는 돌아갔다가 카메라를 챙겨서 다시 온 지라 길게 솟은 굴뚝을 찍을 것을 염두에 두고 광각 렌즈를 챙긴 것입니다. 내부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챙겼던 렌즈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사물이라곤 남아있지 않은 폐허에서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보다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분위기를 표현하기엔 20mm대의 광각이 적합합니다. 게다가 Milvus 25mm f/1.4 렌즈의 경우 왜곡을 훌륭한 수준으로 억제하기 때문에 직선으로 이루어진 이 폐허의 질감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며, 어두운 공간에서 최대 개방을 활용하여 빛의 대비를 표현했음에도 색수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이 보여 2층으로 올라보니 사무 공간이 나타납니다. 긴 복도로 이루어진 2층은 여러 개의 방으로 칸칸이 나뉘어 있습니다. 방마다 창이 나 있고 문이 없는 구조라 각 방의 창으로 들어온 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어두운 복도에 선을 그려 대비를 만들었습니다.

벽 한 켠에 걸려있는 출입카드 거치대는 이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다녔던 사실을 알려주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고요합니다. 복도의 끝 방만이 유일하게 문이 있어 조심히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누가 봐도 이 공장 책임자였을 인물의 공간이 나옵니다. 안쪽으로 크게 난 창은 1층 공장을 한눈에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인데, 덕분에 그의 레이더 안에선 그 누구도 딴짓을 하지 못했을 것만 같습니다. 불우한 주인공인 나오는 옛날 영화를 보면 꼭 이런 공간에서 악덕 고용주가 날카로운 눈을 하고 살펴보곤 하는 장면들이 있었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방을 둘러보니 이 공간의 주인이 또 달리 보입니다. 방 한 켠에 직접 나무를 잘라서 만든 것만 같이 부실한 간이침대가 놓여있는데, 이 침대는 조그맣고, 딱딱하며,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다리가 애처로워서 어쩐지 측은지심이 들기도 합니다. 구조를 보고 악덕 고용주의 전형적인 클리셰와 스테레오 타입과 같은 모습을 떠올렸건만, 실제로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청해야 했을 그의 노동을 생각하니 이 공간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밖으로 나와 한 바퀴 돌아보니 굴뚝이 보입니다. 굴뚝 때문에 찾아 들어온 이 공간이건만 굴뚝보단 다른 것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굴뚝은 인간들이 불을 활용하여 살아왔던 흔적입니다. 그 속에는 따뜻한 벽난로와 요리를 위한 굴뚝도 있겠지만, 산업화된 풍경에서의 굴뚝은 고된 노동을 통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시절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한 굴뚝 아래서 불타고 있는 것들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폐허 속에서 하고 있으니 어쩐지 굴뚝의 의미가 지금까지와 다르게 느껴집니다.




사용 장비 ㅣ 시그마 fp + 자이스 Milvus 25mm f/1.4
*이 콘텐츠의 디지털 이미지는 ‘Dehancer’ 필름 플러그인으로 효과를 낸 것이니 촬영 장비의 광학적 특성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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