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느껴져 살피니 고양이가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도 자리를 지키는 여유를 보여줍니다.
렌즈 때문일 겁니다. 아니면 빛 때문일까요? 오늘따라 유난히 사진 안에서 질감이 살아 숨 쉽니다. SIGMA 28-45mm F1.8 DG DN | Art(이하 28-45mm)는 표준 줌 렌즈이기는 하지만 화각이 묘합니다. 광각에서 딱 표준까지. 줌 렌즈를 손에 쥐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예상하는 최대 망원의 좁은 화각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좀 더 넓습니다. 갸우뚱하면서 한발 다가가면 그때 비로소 원하던 거리감이 나옵니다. 아하! 이것 참.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렌즈로군요!
좁은 골목에서도 문 전체를 담을 만큼 넓은 화각으로 촬영이 가능합니다.
매력적인 골목은 의외성이 높은 곳입니다. 세상에 예상도 못 했던 장면이 계속 툭툭 튀어나올수록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배가됩니다. 문래동은 그런 곳입니다. 좁은 골목 가득 철공소가 모여 있는 문래동은 지금처럼 흥미로운 가게가 들어서지 않았을 때라도 사진 찍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곳입니다. 그러나 그때 문래동 골목 한가운데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이곳저곳을 찍었다가는 흔히 듣는 그 이야기, “여기 찍을 게 뭐 있다고 그래요 찍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피사체에 조금만 다가가면 바로 얕은 피사계심도가 드러납니다. 일부러 앞쪽에 포커스를 맞춰 벗겨진 페인트를 배경으로 활용했습니다.
문래동은 문래창작촌을 중심으로 조금씩 확장됐습니다. 지금은 길 건너 공업사들이 있던 블록까지 조금씩 가게가 들어섰고 그 맞은편 블록에도 음식점이나 주점, 카페 등이 있습니다. SNS에 있는 정보나 지도를 보지 않고 골목 하나하나를 누비며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는 것도 문래동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실력 있는 가게가 많아 어느 곳을 가더라도 기대 이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주문했을 철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이 묵직한 깊이감을 만들어 냅니다.
문래동을 함께한 28-45mm는 전 구간 F1.8 최대 개방 조리개를 가진 특별한 렌즈입니다. 풀 프레임 카메라로는 처음이지만 이전에 시그마는 이와 아주 닮은 렌즈를 앞서 출시한 적이 있습니다. APS-C 사이즈 센서를 가진 DSLR 전용 렌즈였던 18-35mm F1.8 DC HSM | Art 렌즈는 28mm, 35mm, 50mm F1.8 단초점 렌즈를 하나로 합친 것 같은 활용도를 가졌었습니다. 특히 이 렌즈는 영상 촬영 분야에서 환영받았습니다. 미러리스 시대가 되어도 여전히 새 카메라가 나오면 마운트 어댑터를 이용해 활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크롬으로 두른 모터사이클. 금속 표면인데도 색수차가 보이지 않습니다.
18-35mm F1.8 DC HSM | Art가 출시된 지 11년. 그동안 카메라의 구조도 많이 변했고 렌즈 기술도 더욱 발전해서 28-45mm는 풀 프레임 카메라에 대응하는 렌즈임에도 무게 약 950g, 길이 153.4mm 정도로 사양에 비해 콤팩트합니다. 높은 성능과 동시에 핸들링하기에 부담 없는 사이즈를 위해서 렌즈는 호화롭게 구성됐습니다. 15군 18매 구성에 SLD 유리가 2매, 비구면 렌즈가 3매 적용됐습니다. 조리개는 최대 F16까지만 사용할 수 있는데 개방 수치가 F1.8로 빨라 단초점 렌즈와 비슷한 최소 조리개가 되었습니다.
벽에 그려진 그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아주 얕은 심도. 그럼에도 그 안에 풍성한 벽의 질감. 놀라운 묘사력입니다.
렌즈는 조용하고, 빠르며, 초점 위치가 변해도 브리딩이 억제되어 화각이 유지됩니다. 근접 촬영 거리는 30cm로 짧아서 망원으로 줌 하면 작은 피사체를 촬영하는 데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필터 크기는 82mm로 억제했습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필터나 매트박스 등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어서 추가적인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 점도 사용자를 고려한 시그마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문래동에는 자전거가 많습니다. 공업소마다 하나씩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마다 이야기를 지닌 자전거.
시그마에서 렌즈를 소개하는 페이지만 보더라도 사진을 촬영하는 것보다 영상을 촬영하는 이미지가 더 많습니다. 그만큼 영상 촬영에 유용한 기능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요. 우선 이너 줌 방식으로 초점거리를 바꿔도 무게중심이 크게 이동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영상용 삼각대의 카운터 밸런스에 맞춰 무게중심을 설정하거나 짐벌 세팅을 했을 때 안정적인 촬영이 가능합니다.
겨울에는 해가 낮게 뜹니다. 덕분에 선명하고 긴 그림자가 사진에 풍성함을 만들어줍니다.
렌즈는 MTF 차트만 보더라도 놀라운 수준입니다. 단초점 렌즈가 아닐까 할 정도로 샤프니스가 뛰어납니다. 개방 수치가 큰 렌즈이기 때문에 배경과 초점이 맞은 피사체의 분리가 확실한데 선예도까지 높으니 보케가 더 극대화됩니다. 특히 색수차가 정말 적은데 빛을 받는 금속을 똑바로 촬영해도 테두리가 선명합니다.
시그마가 만들어내는 진득한 색감이 이 렌즈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렌즈의 크기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지만 편안하게 촬영하려면 카메라의 크기가 조금 더 큰 편이 좋을 듯합니다. 혹은 작고 가벼운 카메라라면 케이지나 그립을 더해서 손 전체를 사용해 카메라를 파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밸런스가 렌즈 쪽에 있으면 카메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오래 촬영했을 때 쉽게 피로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제외한다면 적당한 렌즈의 굵기, 다양한 기능 덕분에 촬영은 무척 편했습니다.
마치 샤픈을 준 것처럼 선명한 묘사가 연탄재마저도 바위처럼 깊은 질감을 만들어 냅니다.
렌즈의 구경이 커진다면 어두운 곳에서 더 낮은 감도로 촬영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폭도 더 넓어지는 등 장점이 많습니다. 다만 줌렌즈에서 조리개를 더 얕게 만드는 것은 크기와 무게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설계를 더 어렵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시그마 28-45mm는 이러한 난제를 해결해 낸 걸작입니다. 이 렌즈가 많은 사진가, 영상 감독의 손에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를 기대합니다.
원뿔 모양이 겹쳐진 독특한 금속 부스러기. 날카로운 렌즈의 묘사력이 금속의 차가운 느낌을 더욱 강조합니다.
독특한 유리에 맺힌 빛이 윤슬처럼 보입니다.
사용 장비 ㅣ 소니 a7C II + 시그마 28-45mm F1.8 DG DN | Art
본 콘텐츠는 저작권에 의해 보호됩니다. 복제, 배포, 수정 또는 상업적 이용은 소유자의 허가 없이 금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