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에 로망을 갖고 막연한 동경으로 제주에 내려와 살기 시작한 동네는 에메랄드 색 바다가 지척인 아름다운 남쪽 동네였습니다.
도시에서 살다 온 이들에게 시골살이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데, 역시나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가 그러하듯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모두 달라 여전히 시골살이는 즐겁습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한가할 때면 낮에는 산과 들, 바다로 뛰쳐나가기 바빴고, 저녁에는 편집, 사진을 보정하거나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는 일상에 흠뻑 취해있었습니다.
게다가 활기찬 이웃들은 낯선 곳에서의 적응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모여 음식을 나눠먹곤 했습니다(라고 하고 술을 진탕 마시곤 했습니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바닷가 근처에 매운탕이 맛있는 식당을 발견했어. 지금 먹으러 갈 건데, 너도 와.”라는 전화에 발걸음을 돌려 도착하니 오히려 너무 이르게 도착했습니다.

주위를 산책하며 둘러보니 폐허 하나가 눈에 보였습니다. 지금처럼 굳이 찾아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폐허를 보면 궁금증이 동하는 성향은 같았던지라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귤이나 농기구를 보관하던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무엇을 하던 곳인지는 모르겠던 그 건물은 방이 없이 직사각형의 한 공간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천장은 반쯤 무너져 있었습니다.
왜인지 그 폐허의 한가운데는 의자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그 주변은 시멘트를 깨고 나온 녹색 식물이 이미 꽤 시간이 흘러 나무가 되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부서진 천장에서 흘러드는 햇빛까지도 완벽했던 그 순간의 폐허는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장소 같은 느낌까지 줄만큼 신비했습니다.
마침 카메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렌즈는 자이스 밀부스 25mm f/1.4(Zeiss Milvus 25mm f/1.4)로 지금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 렌즈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렌즈인데, 광각임에도 왜곡이 없고 명성에 걸맞게 수차의 억제력은 비교할 만한 대상마저 찾기 힘듭니다. 그럼에 불구하고 공간감과 함께 광각 특유의 과장된 표현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모순이 있는 렌즈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경쟁자는 같은 자이스의 한 렌즈일 테지만(Otus 28mm f/1.4), 그 경쟁자와 달리 휴대가 가능하다는 점은 이 렌즈를 애정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경쟁자는 1350g인데, 1175g밖에 나가지 않으니 얼마나 콤팩트합니까. 자이스의 유일한 단점은 무게이니만큼 1킬로 초반이면 괜찮은 겁니다. 한숨).
그렇게 13군 15매의 꽉꽉 들어찬 렌즈알이 열 일을 하건만 플레어를 막지 못할 만큼 직사광이 렌즈로 들이치고, 어두운 부분과는 그만큼 노출차가 심합니다. 자이스, 그것도 밀부스 시리즈쯤 되는 렌즈를 사용하면서 플레어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그만큼 가혹한 상황입니다. 사실 한 발자국만 옮겨 해를 부서진 지붕 틈으로 감추거나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면 될 테지만 어쩐지 그마저도 싫습니다. 플레어로 망가진 색대비와 플레어의 형상까지 그 날의 기분 탓인지 하나같이 마음에 듭니다.
그대로 한 장의 사진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전 남쪽 마을을 떠나 북서쪽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폐허는 잊었습니다.

어느 날 한 가수의 뮤직비디오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모두가 안 된다며 무시를 하던 시간을 견뎌 앨범을 내고 가수가 되었다는 자전적인 이야기의 이미지가 담긴 로드 트립 형태로 제작해달라는 의뢰였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 그 폐허였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난 데다가 선천적으로 지독한 길치와 방향치인지라 남쪽 해안가 어디쯤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 폐허와 약속 장소였던 식당 모두의 모습은 또렷하건만 정확한 위치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일단 나서서 그 근처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남쪽 해안선 부근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뒤져도 그 식당과 폐허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또 몇 개의 폐허를 만났지만 생각하는 느낌과는 다릅니다.
차를 멈추고 고민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양식장 입구가 아무래도 반쯤 부서지고 스산한 것이 방치된 폐허인 것 같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나마 온전히 형태를 지키고 있는 부속 건물의 입구에는 우편물이 가득 쌓여있고 우편물이 반송되었음을 알리는 스티커가 유리창을 가득 덮고 있습니다.

해안가를 달리다 보면 꽤 많이 보이는 양식장이건만 실제로 그 안을 들어가 본 적은 없는데 구조가 그간 봐왔던 폐허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담하게 보였던 본 건물은 생각보다 거대했으며 지하 2층까지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지하에는 전구, 그리고 그걸 밝힐 전기도 없지만 어둠 끝에 열려 있는 문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그 문밖은 뭐가 있을까 가보니 그대로 지상에서부터 지하 2층까지 관통하는 거대한 수직 통로입니다. 지하 1층에서 보면 아래로는 낭떠러지고 위쪽으로는 하늘이 보이는 아주 독특한 구조입니다.

지하 2층은 발목까지 물이 차있습니다. 지하 1층과 2층의 신기한 점이라면 거대한 기계 장치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폐허의 대부분은 결국에는 유지도 철거도 할 수 없고, 금전적인 여러 사정이 겹쳐있는 경우가 많기에 돈이 조금이라도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이미 사라져있기 마련입니다.
이 폐허도 마찬가지로 난간과 같은 금속 재질은 이미 하나도 남아있질 않은데, 이 거대한 금속 재질의 기계 장치들은 온전하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잠시 생각을 해보면 이 기계 장치들이 남은 이유는 결국 너무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해체와 운송에 드는 비용을 고려하면 결국 이점이 아니기에 남았다는 것이 결국 폐허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지하 2층은 물이 차있어 바닷물이 오가는 구조이고 그 속을 채운 기계 장치들의 정체는 아마도 워터 펌프와 산소 공급 장치인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폐허 속 물에 잠긴, 잘 알 순 없지만 복잡한 기계 장치라는 것이 주는 이미지의 대비는 어쩐지 미국의 저명한 산업 디자이너인 ‘시드 미드(Syd Mead)’의 자료집에서 본 것만 같은 아름다움입니다.

본 건물을 빠져나오니 비로소 양식 수조로 이어집니다. 사각형의 수조는 아래쪽으로 파져 있고 그 사이사이를 통로로 오갈 수 있는데, 이마저도 상당히 넓어서 거대한 사각형이 동일한 패턴으로 펼쳐진 것이 무척 이색적입니다. 더욱이 색상도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원색의 노란색이란 점도 독특한 색채감이 느껴지게 합니다.

이 날 가져간 렌즈는 자이스 오투스 55mm f/1.4(Zeiss Otus 55mm f/1.4)입니다.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한눈에 보여주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제가 이날 이곳을 찾은 것은 장소 헌팅이 목적이었습니다. ‘시드 미드’가 설정 화집에서 영화의 미술을 위해 부분, 부분 세부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과 같은 느낌으로 한 부분씩 담아나갑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폐허는 아니지만, 결국 그 폐허 덕분에 영감이 떠오르는 또 다른 장소를 만났다는 생각에 둘러보면 볼수록 입가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습니다.

멜로디에 맞춰 밝은 느낌의 뮤직비디오와 별개로 가사의 우울한 감정 상태를 따라간 아트웍 필름을 제작하는 것을 이 폐허에서 작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차가운 물까지 차있는 지하의 심연에 갇힌 자아에서 시작해 차츰 빛으로 걸어 나오며 점차 그 빛 속에서 밝은 자신과 마주한다는 느낌으로 전체적인 느낌을 구상했고,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럽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독특한 취향일 뿐인 폐허 탐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사용 장비 ㅣ 시그마 fp + 자이스 Otus 55mm f/1.4 + 자이스 Milvus 25mm f/1.4
*이 콘텐츠의 디지털 이미지는 ‘Dehancer’ 필름 플러그인으로 효과를 낸 것이니 촬영 장비의 광학적 특성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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