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인류학과를 전공했나 싶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하는 행동, 생각, 언어를 사실적으로 연기하면 우리는 깊이 공감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배우의 '실감 나는' 연기 덕에 말이에요. 저를 비롯해 다수의 홍보 담당자들은 이를 두고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도 했는데,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퍽 익숙한 단어일겁니다.
하지만 이 '실감'이 물리적으로 보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고, 정교한 디테일은 경이를 넘어 때로는 공포를 유발하기도 하거든요. 최근 오픈한 전시 중에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론 뮤익》 전시가 그렇습니다. 극사실주의 작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은 사진으로 볼 때도 기묘했는데, 눈앞에 작품을 맞닥뜨리니 압도감마저 들었습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뮤지엄(DDP뮤지엄)에서 열린 《톰 삭스-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는 《론 뮤익》 전시처럼 어떤 공포나 불쾌의 감정을 동반하진 않습니다. 단지 우주, 탐사와 관련된 요소들을 실감 나게 그리고 유머러스하게 담았습니다. 무엇보다 진짜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 합판이나 박스, 일상의 재료 하나, 하나를 엮어 구현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 기술과, 기술로 탄생된 가상의 탐사 세계에 속절없이 매료되고 맙니다.
《론 뮤익》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마스크 II」
「침대에서」/「나뭇가지를 든 여인」
「침대에서」「젊은 연인」
「쇼핑하는 여인」
「매스」
론 뮤익의 작품 리뷰를 구경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불쾌한 골짜기'입니다. 인간이 인간과 매우 유사한 존재를 볼 때 불쾌감을 느끼는 현상을 일컫는데, 로봇 공학 이론에서 나왔으나 현재는 두루두루 쓰이고 있는 단어예요. 론 뮤익의 작품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반면에 극단적으로 작거나 극단적으로 크기도 합니다.(마치 판타지 영화 속 거인족이나 소인족을 보는 듯하죠.) 크기 때문에 인간이 아님을 인지해도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묘한 위화감과 함께 불쾌한 골짜기가 찾아옵니다.
전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작품은 「마스크 II」입니다. 바닥에 볼이 짓눌려 자연스레 벌어진 입, 수염 자국, 모공, 주름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당장이라도 벌어진 입술을 통해 숨을 토해낼 것만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얼굴이 놀랍다가도 한편으론 오싹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얼굴을, 인체의 한 부분을 이토록 주의 깊게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작품을 그리듯 눈으로 좇게 됩니다.
때로는 직접 보는 것보다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것이 작품의 극사실성을 부각시킬 때도 있었습니다. 「쇼핑하는 여인」은 사람보다 훨씬 사이즈가 작지만 사진 속에선 마치 국립현대미술관에 론 뮤익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처럼 보입니다. 일부러 제 시야에 여자의 얼굴이 보이는 위치에서 사진을 찍었더니 예상대로 실재하는 듯한 사람이 화면 속에 있었던 것인데요. 이러한 론 뮤익의 작품 특성 때문에 오히려 두개골이 층층이 쌓인 「매스」가 덜 공포스럽습니다.
전시의 마지막은 론 뮤익의 작업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인데, 이 영상을 짧게라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자칫 양날의 검일 수 있으며 진리의 사바사(사람 바이 사람,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뜻)라곤 하지만 주름 하나, 핏줄 하나마저 인간의 그것 같았던 대상이 사실은 철사, 석고 등의 재료에서 탄생됐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불쾌한 골짜기는 상쇄되고 작품을 '작품'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막혀 있던 감상의 영역이 넓어집니다. 또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꼭 조물주 같기도, 점토를 하나하나 다듬는 것이 조각가 같기도, 수술을 하는 집도의 같기도, 주문 제작 인형을 만드는 인형 제작자 같기도 한 론 뮤익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중간중간 섬찟한데 론 뮤익 작업실이라 납득이 가는 포인트도 영상에 담겨 있어요. 예를 들어 냉장고 안에 있는 얼굴이라든가 쓰레기통에 처박힌 다리라든가. 이 미니 다큐까지 봐야 비로소 전시가 완성되는 듯해 영상 길이가 다소 길고 정적이지만 꼭 한 번 눈에 담아보시기를.
《론 뮤익》
· 전시 기간: 25.04.11.(금)~25.07.13.(일)
· 관람 시간: 월, 화, 목, 금, 일 10:00~18:00 / 수, 금 10:00~21:00
·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
· 관람료: 5,000원
현대카드 컬처 프로젝트 29 《톰 삭스-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 展 @동대문디자인플라자뮤지엄
「Launch」
「Bacon Heat Shield」「Doctor」
「Landing Excursion Module(LEM)」
「Mission Control Center(MCC)」「Space Program NASA Chairs」
「Mars Excursion Roving Vehihle(MERV)」
「Mary's Suit」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의 우주 탐사 계획을 재구성한 대형 설치와 조각 작품으로 구성된 《톰 삭스-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이하 《톰 삭스》) 전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생각났는데요. 《톰 삭스》 전은 ‘멀리서 보면 공상, 가까이서 보면 현실’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이 한 문장으로 단순히 정의할 수 없지만 그만큼 정교하게, 재미있게 탐사의 영역을 구현했습니다.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전시'라는 현대카드 컬처 프로젝트 관계자의 말은 조악한 듯, 사실적인 듯 그 경계가 오묘한 작품들로 빌드 업을 하더니 거대한 탐사선과 미션 컨트롤이 들어선 마지막 전시실에서 화룡점정을 찍으며 증명됩니다. 광활한 그곳은 여러 가지 재료가 모여 디테일로 종착한 끝에 탐사선 이륙장으로, 채굴된 화성으로(실제로 조명도 살짝 주황빛이 돌아 긁어낸 화성 표면을 보는 듯한 기분입니다.), 미션 컨트롤로 탈바꿈하면서 우리가 쉽게 갈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미련, 아쉬움을 대신합니다. 신기한 건 실제 미션 컨트롤에서 사용되는 것들을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고, 실제 탐사선의 일부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니며 심지어 여러 재료로 구현한 물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실제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허무하진 않습니다. 톰 삭스는 그만의 상상력으로 아주 세밀하고 거대하게 탐사의 세계를 구축했고, 쏟아지는 관람객의 감탄 위로 한 조각의 유머가 침투하게 만들면서 이 전시의 특별함을 더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예요. 화성 탐사 로버의 내비게이션 카메라 대신 달린 우산, 안테나 대신 꽂힌 빗자루 같은 것이요.
개인적으로 《톰 삭스》 전은 저에게 마지막 전시실로 향하는 여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Riscar: Robert Irwin Scrim Clean Air Room」에서 우리 몸을 정화시키고, 발굴(Excavation)과 우주생물학(Astrobiology) 섹션에서 우주와 탐사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고 탐사선과 마주하게 되면 마치 모든 과정을 수료한 우주비행사가 되어 이륙장에 도착한 기분이 들거든요. 오랜만에 가볼 수 없는 곳에 대한 동경을 누군가의 상상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봤습니다.
《톰 삭스-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
· 전시 기간: 25.04.25.(금)~25.09.07.(일)
· 관람 시간: 10:00~20:00
·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뮤지엄(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 관람료: 성인 20,000원 / 청소년 15,000원 / 어린이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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