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데군데 시간이 멈춘 동네가 있습니다. 서울역 뒤편에 자리한 이곳은 서울역이 처음 건설될 당시 통과역으로 설계되면서 철로가 서울 도심을 이분화함에 따라 도심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동네, 서계동과 청파동은 도시 중심부에 있지만 근대화의 유산을 간직하고 독특한 장소성을 띠게 된*, 과거와 현재가 맞물려 진공의 시간에 있는 듯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혹자에겐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동네이기도, 또 다른 이에겐 골목에 대한 어떤 기대, 낭만,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소설 <불편한 편의점>으로 익숙한 동네입니다. 혹은 낯설기도 한 곳이고요.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저에게 청파동은 익숙한데 낯선 곳이었습니다. 서울역 근처, 숙명여대가 있는 동네에 종종 가본 적이 있었지만 '청파'라는 지명을 인지하며 사용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 '청파동'을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데엔 지명이 주는 느낌 덕분이었습니다. 푸른 언덕이 많아 청파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설과 조선 세종 때 명인 청파 기건이 거주했다는 설이 공존하지만 근래에는 전자로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듯해요. 아무래도 어딘가 낭만적으로 느껴지니까요. 푸른 언덕이라는 그 뜻이요. 저도 그 뜻에 이끌려 청파동에 발을 내디뎌보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느낄 수 있었던 5월 말의 어느 날, 더 더워지기 전에 서계동과 청파동을 걸었습니다. 가파른 지형과 언덕 때문에 길을 걷는 일이 수월치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난도가 있는 동네였어요. 그럼에도 구석구석 포인트가 있는 동네이기도 해 GR 카메라로 찍기 딱 좋았습니다.
[이동 경로]
서울역 > 옛 국립극단 > 개미슈퍼 > 청파책가도 > 성우이용원 > 킷테 > 어티피컬
멀리 보이는 옛 국립극단
서계동 골목 진입로
서울역 15번 출구로 나오면 멀리서도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진 '서계동 빨간 지붕' 옛 국립극단이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2010년 옛 기무사령부 수송대 건물을 개조해 공연장과 연습 시설로 사용했던 옛 국립극단은 연극 중심 복합문화공간으로 지정되면서 2023년까지 서계동을 지키다 15년 만에 국립극장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습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빨간색 건물은 여전히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어요.
빨간 지붕을 보다가 그 뒤로 삐죽삐죽 솟아오른 건물로 시선을 돌리면 지대가 높다는 말을 실감하게 돼요. 서울역을 사이에 두고 서계동과 청파동의 반대편엔 후암동과 이태원이 있는데요. 이 동네들은 서로 지형이 닮아 있었습니다. 후암동에 갔을 때도 등산을 했었는데 여기서도 피할 수 없겠단 깨달음은 그 후에 찾아왔습니다.
지나고 보니 국립극단 건물의 강렬한 빨간색은 이 산책의 스포일러였습니다. 2시간을 걸으며 눈에 담았던 서계동과 청파동은 색이 있는 동네였거든요. 그리고 오후 1시 30분의 서계동은 빨간색만큼이나 뜨겁고 또 뜨거웠습니다.


5월을 끝으로 문을 닫은 개미슈퍼
서계동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동네 명물, 개미슈퍼는 서울역에서 금방이었습니다. 친근한 골목과 롤러코스터 트랙 같은 길을 따라 걷다가, 벽화를 구경하다가 개미슈퍼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저를 반겼던 건 작별의 인사였습니다. 1990년대 봉제산업과 역사를 같이 해온 개미슈퍼는 2000년대 봉제산업의 사양화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2015년, 외국인들이 여행지로 찾기 시작하면서 타깃을 달리한 곳입니다. 다시 개미슈퍼를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서울관광정보에 소개되기도, 서울역 도보 투어의 코스 중 한 곳이 되기도 하면서 서계동의 명물 관광지가 됐어요. 이렇게 주변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할 때도 120여 년이 넘도록 서계동의 한 자리를 지켰던 개미슈퍼가 5월을 끝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가게 문에는 덕분에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건강하고 행복하라는 사장님의 짧은 글이 붙어 있었는데요. 부랴부랴 이곳을 찾은 덕에 서계동의 속길에서 이제는 뒤안길로 걸어갈 준비를 한 개미슈퍼의 마지막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을 담을 수 있었다는 어떤 안도감보다는 오랜 역사가 장막을 드리울 때마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작게 휘몰아치는데요. 가장 닮은 감정은 아마도 아쉬움이겠죠.
미세먼지 때문에 흐렸던 날이 아쉬웠던 구도. 빌라 건물 사이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게 되는 순간
매우 가팔랐던 계단
높은 지대가 느껴지는 건물과 건물 틈
청파책가도 외관
푸른 언덕이란 뜻답게 서계동과 청파동은 구릉지(완만한 경사의 낮은 산이나 언덕이 계속되는 지형)입니다. 비탈 위에 세운 계단은 가팔랐고 건물과 건물 틈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고층 건물의 윗부분이 시야에 걸렸습니다. 이쯤에서 후암동이 많이 떠올랐어요. 후암동에 비하면 경사가 완만한 편이긴 하나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촘촘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 건물들, 가파른 계단과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등장하는 길, 미로 같은 골목. 일란성 쌍둥이보다는 이란성 쌍둥이 같은 느낌이에요.
내부 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던 청파책가도를 지나 만리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신흥시장 가는 길이 생각났던 만리시장 가는 길
만리시장 내부

도시의 혈관, 전깃줄
만리고개에 있는 만리시장은 1968년에 문을 연, 올해로 57년이 된 종합상가식 전통시장입니다. 입구 근처는 조금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풍겼지만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저마다의 준비와 기다림으로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만리시장 일대엔 식자재나 음식을 파는 가게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일렬로 늘어서 있어 그 공간 자체가 커다란 시장이기도 했어요.
만리시장을 거쳐 숙대입구로 가는 길, 전깃줄을 도시의 혈관이라 표현하며 사진을 올렸던 세기몰 회원의 말이 떠올라 찍은 사진입니다. 촬영한 이후 오른쪽 아래에 있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는데 몇 발짝만 걸으면 동이 아니라 구가 바뀌는 것이 신기했어요. 생각해 보면 청파동 옆 동네가 공덕동이고, 공덕동은 마포구인데 말이죠.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마포구가 새겨진 빗물받이가 보였습니다.
성우이용원

옛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brand21은 용산구가 아닌 마포구 소재 카페
숙명여대로 가던 중 잠시 옆길로 빠지니 1927년에 개업해 3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중인 성우이용원이 보였습니다. 곧 개업한 지 100년이 되어가는 이곳은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요. 2019년 태풍으로 외관이 손상된 성우이용원은 서울미래유산의 멸실과 훼손을 막고자 서울시 지원 사업을 통해 새 외관을 갖추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의 옛 모습은 이제 사진으로만 볼 수 있지만 100년의 세월을 거친 그 증거가 여전히 땅 위에 서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습니다.
*출처: 서울관광정보
골목 곳곳에 봉제산업을 이어가는 가게들이 있었는데요. 열린 문틈으로는 색색의 실과 천들이 뒤섞여 그곳만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같은 시간 속에서 저마다의 일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돼요. 그중 저는 길을 걸으며 풍경과 사람을 관찰하고 있죠. 가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수십, 수백, 수천 가지의 삶이 신기하면서도 문득 현실감 없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청파동을 걸으면서 오랜만에 그런 기분과 마주했어요.

숙명여대 가는 길



카페 킷테
소품샵 어티피컬
붉은 벽돌집과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빌라 건물들이 한데 섞여 청파동만의 독특한 정취를 만드는 숙명여대로 가는 길. 도로와 인도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에선 차를 피하느라 담벼락에 몸을 한껏 밀착해야 했지만 여느 골목처럼 조용하기도, 다소 어수선하기도, 고즈넉하기도 했습니다. 골목의 매력이라 하면 같은 길인데도 다른 분위기를 낸다는 점이에요. 숙명여대로 가면서 다양한 느낌을 받은 것처럼요.
숙명여대 후문에 가까워지자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한 카페 '킷테'가 보였습니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전통적인 적산가옥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90도의 경사 지붕을 얹은 구조는 서구의 양식을 본떴고 바닥에는 온돌을 깔았었다고 해요. 리모델링을 맡은 건축가가 이 건물을 화양절충식이라 표현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외관만 봐도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봤던 적산가옥과는 달랐습니다. 어떠한 정보도 없이 이 건물을 봤다면 일제강점기에 일본 건설회사 임원이 살았던 가옥이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또 시멘트를 개어 손으로 던지는 식으로 구현한 건물 외관의 독특한 질감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였고 채도가 빠진 노란색이 이날 날씨와도 무척 잘 어울렸어요.
*출처: 삼각 지붕에 온돌 깐 95세 적산가옥...현대식 카페로 재탄생(25.03.18, 한국일보)

알록달록 담벼락


장미 덩굴 1
장미 덩굴 2
요즘 연남동, 연희동을 비롯해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집 대문, 외벽을 타고 붉은 꽃망울을 틔운 장미 덩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요. 서계동과 청파동에도 5월의 여왕, 장미가 등장했습니다. 처음 보는 꽃은 아니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걷다 보니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만드는 이런 풍경들이 하나같이 반가워요.
그리고 서계동~청파동을 걸으면서 수많은 색과 마주쳤는데요. 문부터 담벼락을 물들인 색색의 페인트 덕에 알록달록한 사진을 담을 수 있었고 이는 체력에 부치는 와중에도 소소한 웃음 포인트였어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재미있고 사소한 풍경 덕분에 2시간의 산책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남영역 가는 길
조용했던 골목을 벗어나니 분주한 도심이 다시 눈앞에 펼쳐집니다. 익숙했지만 한편으로 낯설었던 서계동과 청파동이었는데 이제 "서계동과 청파동은 알록달록한 동네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조금 더 익숙해진 듯합니다.
다음에 방문하게 된다면 조금 더 청량한 날일 때, 조금 더 편안한 신발을 신고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갈 거예요. 그만큼 구석구석 봐야 할 곳이 많은 동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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