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맵 위에 삿포로를 놓으면 가장 먼저 등록될 단어는 아마 '눈'이지 않을까. 삿포로란 단어엔 추운 겨울과 하얀 설경, 뿌연 입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삿포로는 눈의 도시로 유명하니깐.
반대로 나는 삿포로의 여름을 찾아 떠났다. 눈을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눈으로 유명한 이 도시의 여름이 성큼 존재를 알렸다. 우연히 '청의 호수' 사진을 본 순간 이곳을 직접 봐야겠다는 충동이 일었고, 본격적인 성수기 시즌에 접어들기 직전 삿포로로 떠났다.
삿포로가 있는 북해도(홋카이도)는 여름에도 꽤 선선하다고 알려져 있다. 눈만큼이나 더위를 피하고 싶은 나에게 이만한 곳이 없었고, 드디어 '관념적 여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차올랐다. 투어도 예정되어 있어 자타공인 날씨 요정인 친구의 기운을 받아 6월의 어느 날, 신치토세 공항에 발을 내디뎠고 나를 맞이한 건 30도를 웃도는 더위였다.
삿포로
날씨: 대체로 맑음⛅
절망적인 소식 속 희망적인 사실 하나. 습도가 비교적 덜해 해가 잠잠해지는 오후에는 걷기에 괜찮은 날씨였다.
여행 첫날은 늦은 오후에 공항에 떨어져 마음이 급했다. 해가 지기 전에 홋카이도 대학에 가고 싶었기 때문. 숙소가 있는 역에 하차하는 리무진 대신 삿포로 역에서 환승해야 하지만 더 빨리 갈 수 있는 공항 열차를 타고 삿포로 시내로 들어갔다. 캐리어를 호텔 방에 넣어둔 뒤 바로 기타주니조 역으로 갔다. 막상 역에 도착하니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배가 고파 북마크를 해두었던 수프 카레 전문점에서 수프 카레를 먼저 먹은 뒤 홋카이도 대학을 걸었다. 내가 먹은 수프 카레는 점성이 묽어 수프보다는 국에 가까웠고 똠얌꿍을 연상케 했다.
홋카이도 대학 은행나무 길



📍홋카이도 대학교 北海道大学
5 Chome Kita 8 Jonishi, Kita Ward, Sapporo, Hokkaido
첫인상은 '나무가 정말 많다.'
대학교 건물이 아니었으면 커다란 공원 혹은 잘 조성된 숲 산책로가 떠오를 정도로 나무가 무성했다. 정문이 아닌 은행나무 길 입구로 들어간 늦은 오후의 캠퍼스는 고요했다. 비단 소음이 적어서가 아니라 커다란 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는 캠퍼스 이미지가 '고요'를 시각화한 느낌이었다. 캠퍼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그제야 여러 가지 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이 고요를 깨뜨렸다. 이미 이곳은 운동의 성지인 듯(?) 러닝이나 조깅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캠퍼스가 넓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았다. 편의점 앞에는 학생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마치 대학내일 매거진에서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북해도에만 있는 세이코 마트 편의점에서 멜론 아이스크림을 산 뒤, 마저 산책을 했다. 워낙 넓어 다 돌아보진 못했지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어스름한 어둠이 깔린 캠퍼스를 천천히 걷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홋카이도 대학교가 산책 코스로 많이 알려진 곳이라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과 걷는 일도 종종 있었고, 시선을 돌리는 모든 곳에 초록색이 가득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저절로 걸음이 느려졌다. 돌이켜보건대 삿포로에 있던 나흘간의 일정 중 가장 평화로운 찰나였다.
참고로 지난 24일에 피부에 닿기만 해도 염증 반응이 나타나는 큰멧돼지풀이 홋카이도 대학교 삿포로 캠퍼스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해당 구역은 출입이 제한됐으나 혹시 모르니 산책을 하되 식물을 만지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삿포로 시계탑(내부 관람 유료)
삿포로 TV 타워
홋카이도 대학교를 나와 요도바시, 삿포로 시계탑, 삿포로 TV 타워를 보고 호텔이 있는 스스키노 역까지 걸어갔다. 삿포로 요도바시 2층에 카메라 존이 있는데 필름은 한국과 금액 차가 크지 않아 구매하지 않았다. 개중엔 벨비아 필름도 있었는데 벨비아 100은 5,500엔, 벨비아 50은 6,050엔인 것을 보고 산다 한들 쓰기 아까워서 냉장고에 보관만 해두다가 무덤까지 들고 가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삿포로 TV 타워가 있는 오도리 공원은 해가 지자 선선해진 날씨 덕에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고 한낮의 공원이 궁금해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들르기로 했다.

오도리 공원
낮에 본 삿포로 TV 타워
📍오도리 공원 大通公園
7 Odorinishi, Chuo-ku, Sapporo 060-0042 Hokkaido
여행 셋째 날, 오타루를 다녀와서 바로 오도리 공원으로 향했다. 6월 21일부터 오도리 공원에선 플라워 페스타 2025가 열려 예쁘게 가꿔진 꽃들이 널따란 공원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꽃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공원에 있는 여행자들도, 현지인들도 이 시간, 이 여유를 자연스럽게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 노래를 들으며 길을 걷는데 이때만큼은 공원의 소리를 들었다. 분수대 물소리, 이야기 소리, 차 소리가 전혀 소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오도리 공원의 소리 같았다. 걷느라 피로가 쌓인 다리를 잠시 놔줄 겸 벤치에 앉아 삿포로 TV 타워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 어쩐지 나도 이 시간을, 이 여유를 즐기는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꼭 조용한 것만이 평화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순간 많이 깨달았다.
가로수에 붙어 있는 까마귀 조심 안내문
참, 삿포로에 까마귀가 많다. 하늘이 흐린 날에는 까마귀가 빠른 속도로 저공비행을 해서 정말 무섭다. 도시에 완벽 적응한 까마귀들은 인간이 걷든, 차가 움직이든 아랑곳없이 까악까악 소리를 내며 날거나 걸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모습은 차선에 서 있다 차가 움직이자 그대로 총총 걸어 인도로 가던 까마귀의 느긋한 몸짓이었다. 까마귀 눈에 띄지 않으려 일부러 하늘도 잘 안 봤는데 까마귀가 가끔 물건을 훔쳐 가거나 공격할 때가 있다고 하니 삿포로에 갈 일이 있다면 까마귀를 조심할 것.
후라노&비에이
날씨: 대체로 맑음⛅→비🌦️
내내 흐리고 비가 내린다는 예보와 달리 후라노는 꽤 맑고 더웠다. 가이드는 예보를 비껴갈 때가 많아 가봐야 날씨를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후라노&비에이 스폿은 차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투어를 신청해 움직였다) 겨울엔 크리스마스 나무로 유명한 후라노&비에이 투어는 시즌에 맞춰 스폿을 유동적으로 운영하는데, 여름에는 보랏빛 라벤더와 색색의 꽃을 볼 수 있는 팜도미타, 거대한 화원이 조성된 사계채의 언덕, 그리고 푸른빛이 신비로운 청의 호수와 흰수염 폭포를 볼 수 있다.


라벤더 밭
팜도미타
후라노 멜론
📍팜도미타 ファーム富田, Farm Tomita
Kisen Kita 15-go, Nakafurano-cho, Sorachi-gun, Hokkaido
첫 번째 장소는 여름이면 라벤더가 만개하는 팜도미타. 보통 라벤더는 7월 초중순에 절정이라 삿포로 관광도 이때가 성수기인데 6월 말에도 보랏빛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라벤더가 많이 핀 상태였다. 팜도미타엔 커다란 나무들이 있어 군데군데 그늘이 졌고 걷다가 더우면 나무 아래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꽃밭 가까이에 가려면 양산과 선글라스, 모자는 필수. 가이드가 말하길 몇 년 전부터 삿포로도 여름에 기온이 많이 오르고 덥다고 해 관념적 여름을 바라기엔 너무 늦게 왔다 싶어 아쉽고 또 씁쓸했다.
보라색 물결을 이루는 라벤더와 무지개가 연상되는 꽃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꽃밭 사잇길을 지나갈 때마다 꽃향기가 더운 공기를 타고 부유했다. 라벤더 꽃망울을 자세히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는데 보송보송한 타원형의 꽃망울이 아기자기하고 귀여워 자꾸 보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가이드가 준 30~40여 분의 시간 동안 팜도미타 한 바퀴를 돌고 난 후 후라노 멜론을 사 먹었다. 다들 동남아 여행을 다녀오면 '동남아 과일은 달라 병'에 걸린다던데 나는 '후라노 멜론은 달라 병'이 찾아올 뻔했다. 그만큼 여태 먹었던 멜론 중에 가장 달콤하고 맛있었다. 590엔이 아깝지 않은 맛. 가이드 말에 따르면 처음 수확한 멜론 2개가 올해는 1,000만 원에 낙찰되었단다. 가장 높게 팔렸을 때는 5,000만 원까지 치솟았다고. 그만큼 후라노 멜론이 유명한데 이야기만 들었을 땐 그 정도인가 싶었건만 먹어보니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계채의 언덕
트랙터 버스
📍사계채의 언덕 四季彩の丘
3 Shinsei, Biei-cho, Kamikawa-gun 071-0473 Hokkaido
사계채의 언덕은 지대가 높아 주변 지형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7 헥타르(약 21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화원답게 꽃과 풀이 굽이진 언덕마다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길목에 그늘이 일절 없는데 공간은 엄청 넓고 낮을 향해 갈수록 점점 더 더워진다는 것이었다. 걷는 게 힘들다면 입구에서 트랙터 버스(16세 이상 500엔, 7~15세 300엔)를 타는 것을 추천하는데, 직관적인 네이밍처럼 트랙터가 동력인 이동 수단이다. 그 모습이 사계채의 언덕과 잘 어울려서 은근히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더위에 지친 나는 돌아다니길 포기하고 지붕이 있는 쉼터에 앉아 먼 풍경만 하염없이 감상했다. 마치 내 눈이 광각렌즈가 된 기분이었다. 날이 좋으면 사계채의 언덕에서 대설산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대설산은 활화산이라 분화구에서 연기가 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동 중에 가이드가 연기가 나고 있는 곳을 알려줬지만 연기와 구름을 구분하지 못해 사실상 못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의 호수
📍청의 호수 青い池
Shirogane, Biei-cho, Kamikawa-gun 071-0235 Hokkaido
산속 깊숙이 숨어 있는 청의 호수는 화산 쇄설물이 강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제방으로 물이 흘러들어 형성된 인공 호수다. 물속에 콜로이드성 수산화알루미늄 성분이 포함돼 푸른빛을 띤다.
날씨에 따라 호수의 빛깔이 미묘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당일 날씨가 정말 중요했는데 다행히 눈에 맺힌 것은 청록빛 물이었다. 호수가 이렇게까지 소다처럼 보일 수 있나? 날도 더운데 한 모금 마시면 정말 시원할 것처럼 생겼는데? 뽕따보다는 뿌요 소다 맛일 것 같다 등등 상상의 가지가 저절로 뻗어나갈 만큼 매력적이고 이곳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보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정말 청록색이었다. 자작나무가 있는 중앙부로 갈수록 -수산화알루미늄 성분 때문에 호수에 있는 자작나무는 모두 죽은 나무들이다.- 당연하게도 청록빛이 더욱 짙어졌다. 청의 호수 바로 옆에는 고여있지 않은 비에이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으며 주변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청의 호수 '요새'에 있는 기분도 들었다. 호수 표면을 뚫고 나온 듯한 자작나무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청의 호수 근방 지역을 달리다 보면 초록빛 틈새에서 하얀 줄기를 드러낸 자작나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관람 시간이 끝나갈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호수 표면에 이는 파동이 매우 아름다웠다. 푸른 물결이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모습을 꼭 찍고 싶었는데 우산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부리나케 버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눈앞 풍경도 중요하지만 카메라도 중요하니깐.
이 다리 위에서 폭포를 감상한다.
흰수염 폭포
비에이 강
비에이 강
📍흰수염 폭포 白ひげの滝
Shirogane, Biei-cho, Kamikawa-gun 071-0235 Hokkaido
마지막 장소는 청의 호수에서 차로 약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흰수염 폭포로,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이 흰 수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직관적인 이름의 관광지다. 멀리서부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곧 다리 아래로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대는 폭포가 보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폭포인데 온천수가 섞여 있기 때문. 물 온도는 약 50도 정도라고 한다. 폭포 아래로는 비에이 강이 흘러 이곳에서도 푸른빛을 띠는 기다란 강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세찬 물줄기보다는 폭포수와 합류하여 멀리멀리 뻗어나가는 비에이 강이 더 인상 깊었다. 투어의 완벽한 마무리.
오타루
날씨: 흐림☁️→비🌦️
오타루로 가는 기차 안, 수평선은 흐릿하고 구름과 안개가 뒤섞인 하늘과 파도가 치는 창밖을 보며 비가 내리지 않길 기도했지만 날씨 요정은 후라노&비에이부터 힘을 잃은 듯하다. 미스트 같은 비가 흩뿌려지고 하늘은 내내 회색이었다. 미나미 오타루 역에서 내려 오르골당이 있는 곳까지 걷는 동안 불었던 세찬 해풍은 순탄치 않을 오타루 여행을 예고했다.




오타루 오르골당
📍오타루 오르골당 小樽オルゴール堂
4-1 Sumiyoshicho, Otaru, Hokkaido
오르골 박물관답게 세상에 있는 모든 오르골이 모여있는 것 같은 규모를 자랑한다. 나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1902년에 지어진 이 건물의 히스토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따뜻한 전구색 조명이 목재와 잘 어울렸지만 무엇보다 투명한 오르골 돔에 반사된 빛이 오르골을 더 반짝반짝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오르골이 사고 싶어지는 충동이 인다. 건물 2층에서 바라보는 1층 풍경이 장관이니 꼭 2층으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추천. 아기자기한 오르골도 많지만 흡사 골동품을 연상케 하는 오래되고 다양한 형태의 오르골도 많아 구경할 거리가 많다.
르 타오 본점
대전이 성심당의 도시라면 오타루는 르 타오의 도시였다. 르 타오 본점, Dani 르 타오, 르 타오 파토스, 르 타오 플러스, 누벨바그 르 타오 쇼콜라티에, 르 타오 캐널 플라자 스토어까지 잊을만하면 르 타오 간판이 보였다. 본점은 이미 대기가 있어 Dani 르 타오에서 가볍게 프로마쥬 데니시를 먹은 뒤 르 타오 파토스에서 오타루에서만 판매하는 허니 밀크 케이크 Miaulait를 홀린 듯이 구매했다.(한정판이라 비싸다. 4개입에 1,296엔) 모양이나 전체적인 맛은 다쿠아즈인데 씹다 보면 벌꿀 맛이 엄청 강하게 나고 마치 벌집 아이스크림 위에 올라간 꿀을 가득 삼킨 느낌. 얼얼한 단맛은 아니라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데누키코지

니토리 미술관 :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 작품
📍오타루 데누키코지 小樽出抜小路
1 Chome-1 Ironai, Otaru, Hokkaido
📍니토리 미술관 似鳥美術館
1 Chome-3-1 Ironai, Otaru, Hokkaido
직진하다가 골목길로 새다가 길을 건너다가 다시 직진하기를 반복하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얼떨결에 데누키코지에 도착했다. 데누키코지는 라멘, 야키토리 등을 파는 식당이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골목이 생각보다 더 좁고 공간이 아담하다. 이때 비가 내려 우산까지 편 상태에선 양방향 통행이 어려울 정도. 그 어디보다도 현지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라 구경 겸 들르기 좋다.
골목 구경을 하다 데누키코지 근처에 있는 니토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궁금하다면 더 많은 종류가 전시된 스테인드글라스 미술관으로 가는 것이 낫고, 나는 회화까지 감상하고 싶어 니토리 미술관을 선택했다. 날이 궂어 데누키코지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기도 했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1,200엔. 4개의 미술관과 전시관을 갈 수 있는 통합 패스도 있어 전시관 투어가 목적이라면 개별 입장료를 지불하는 것보다 통합권을 사는 것이 효율적이다.
*오타루 예술촌 통합 패스: 어른 2,900엔 / 대학생 2,000엔 / 고등학생 1,500엔 / 중학생 1,000엔 / 초등학생 500엔
니토리 미술관은 1층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만 촬영할 수 있으며 2~4층 전시관은 촬영 불가 구역이다. 전시관이 아니라 성당에 들어간 듯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하나하나 오묘한 빛깔을 뿜어내는 와중에 글라스 데코(스테인드글라스 효과를 낼 수 있는 교구)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어렸을 적엔 멋모르고 글라스 데코 물감을 쭉쭉 짜며 그림을 완성했던 것이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울 정도가 됐다. 성당 같은 건축물 일부가 아니라 작품이지만 아주 웅장했고 화려한 색감이 어두운 공간에서 더욱 돋보여 전시 구성도 만족스러웠다.



오타루 운하
구 테미야선 기찻길
📍오타루 운하 小樽運河
Minatomachi, Otaru, Hokkaido
📍구 테미야선 기찻길 旧手宮線
1 Chome-7-14 Ironai, Otaru, Hokkaido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던 오타루 운하. 하늘이 파랬으면 확실히 분위기가 더 있었을 텐데 흐린 하늘 아래 오타루 운하는 조금 을씨년스럽고 어쩐지 밋밋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흐려도 대기는 좋아 운하 다리 위에 서면 시야가 꽤 멀리까지 트여 멍하니 감상하게 된다. 운하 옆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것 역시 의외로 운치 있는 일이었다. 날이 좋았다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벤치에 앉아 운하를 보며 노래를 듣고 싶었는데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타루 역으로 가는 길에 1880년에 개통되어 1985년에 폐선 된 옛 국철 테미야선 터가 남아 있다. 경춘선 숲길이 생각났던 곳.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방향으로 기찻길이 뻗어 있는 곳이라 가볍게 기념사진을 찍고 가기에 괜찮은 장소였다.
삿포로의 아침도 오타루처럼 흐렸는데 돌아오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갠 상태였다. 바람은 좀 세찼지만 햇빛도 좋았고 많이 덥지도 않아서(이날 오후가 내가 예상했던 관념적 여름과 가장 닮아 있었다.) 오도리 공원 산책 후 현지인들로 가득했던 돈코츠 라멘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국물 먼저 마셨는데 매우 진하고 감칠맛이 상당해 처음엔 혀가 적응하지 못했다. 입안이 조금 기름질 때쯤 추가 주문한 하이볼로 싹 씻어주면 또 면이 술술 잘 넘어갔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사흘이 사라졌다.
오타루 역
오타루 역에서 바라본 오타루
돌아가는 날, 애석하게도 햇빛이 쨍쨍. 삿포로에 머문 4일 중 가장 맑았다. 힘을 다 쓴 줄 알았던 날씨 요정의 기운이 마지막 날에 몰리다니. 어쩔 수 없이 드는 원망을 뒤로하고 조금 이르게 공항 리무진을 탔는데 이건 키노토야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사실 아니다. 내가 타는 리무진 승차장이 기점이 아닌 데다 성수기 시즌엔 리무진을 몇 대 보낼 수도 있다 하여 일찍 움직였다.)
삿포로는 멜론, 수프 카레뿐만 아니라 유제품이 유명한데 이곳 아이스크림이 맛있기로 소문이 나 줄이 상당했다. 이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키노토야는 아이스크림이나 쿠키를 구매하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인산인해인 곳이다. 시간은 충분했고 삿포로에서 먹은 유제품이라곤 첫날 편의점에서 산 멜론 소프트아이스크림뿐이라 웨이팅에 도전했다. 20여 분을 기다린 끝에 아이스크림을 받았는데(콘/컵 모두 개당 490엔) 일단 아이스크림을 듬뿍 올려주고 우유 맛이 상당히 진해 490엔이 아깝지 않았다. 이곳에서 아이스크림을 산 사람들은 근처에 서서 혹은 의자에 앉아서 기다란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도 거기에 합류했다. 삿포로에서 먹은 마지막 음식이었는데 만족스러웠다.
상점가에서 국제선으로 향하는 통로가 잘 연결되어 있고, 멀지 않지만 키노토야를 비롯해 유명한 음식점이 대부분 국내선 라인에 모여있기 때문에 출국 전에 시간을 확보하고 도착해야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스스키노 역 근처 관람차
삿포로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전차
비록 상상하고 기대했던 여름은 없었고 날씨도 오락가락했지만 이번 여행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걸을 틈, 잠시 앉았다가는 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틈, 같은 대상을 여러 번 찍을 수 있는 그런 틈 말이다. 자연을 많이 본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자연은 그 시간, 그 순간에 오로지 눈앞에 있는 대상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잡념과 소음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는 잠시 멀어지면서 현재만이 존재했다. 쉽게 할 수 없었던 경험이라 낯설기도, 어색하기도 했지만 이런 발견이 또 여행의 맛이기도 하니깐.
이런 맛이라면 배가 불러도 먹어서 내 안에 남겨두고 싶다. 벌써 다음 여행지를 찾게 되는 것도 이 때문. 다음엔 어디로 떠나볼까. 즐거운 고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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