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잔혹한(?) 상상을 합니다. 맹렬한 기세로 열을 내뿜는 태양 아래에서 제 피부가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황야의 마녀처럼 되는 상상을요.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혹은 태워버릴 듯한 더위와 끈적한 습기. 1분은커녕 1초만 서 있어도 등줄기를 타고 질주하는 땀방울. 양산과 선크림, 손풍기로 묵직해진 가방과 고통을 호소하는 어깨. 결국 몸은 시원한 공기를 요구하는 SOS를 보내오고, 그 신호에 '야외지옥, 실내천국'을 따르게 되는 공간을 찾았습니다. 누군가와 붙어 있기엔 너무 더운 여름이니 혼자 놀기 좋은 데다 감각적인 분위기까지 갖춘 곳으로요.
플라뇌즈 페잇퍼 점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15안길 32-7
-화~금 13:00~20:00, 토~일 12:00~20:00 (매주 월 정기 휴무)
-인스타그램


2층
3층


이날 구매한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TMI로 시작하자면 제 최애 소설은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입니다. 입문하기 좋은 SF 장편 소설이에요. 거대한 세계관과 달리 촘촘한 주인공들의 감정선, 사랑과 연대를 말하는 이야기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저 역시 『지구 끝의 온실』로 SF 소설계에 발을 들였고, 이 작품 덕분에 다른 SF 작가들의 소설을 하나 둘씩 독파했습니다.
플라뇌즈*는 무한하고 차가운 공간 속에 뜨거운 상상력을 담은 SF 작품이 모여있는 독립서점입니다. 제가 다녀온 페잇퍼 점은 만화카페 페잇퍼에서 팝업으로 운영 중인 곳이에요. 입문 SF부터 하드 SF, 그리고 플라뇌즈의 시작이었던 걷기와 여행에 관한 책까지 공간은 협소하지만 도서 종류가 제법 다양해요. 2층은 SF 소설, 3층은 플라뇌즈 본점과 조금 더 밀접한(걷기 등) 도서가 있습니다. 3층에선 북토크 등의 행사도 진행되고 있어요. (2층으로 바로 올라가면 돼요.)
*플라뇌즈(Flâneuse): 도시 방랑자/산책자를 의미하는 플라뇌르(Flâneur)를 재해석한 단어. 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일컫는다.
사장님이나 독자가 남긴 감상 코멘트가 책장 군데군데 있는데 그 글귀만 읽어도 책을 사고 싶은 욕구가 드릉드릉 올라와요. 느낀점뿐만 아니라 책에 대한 애정, 작가를 향한 애정, 나아가 '플라뇌즈'가 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도 알게 해주는 코멘트예요. 책을 사랑하는 사장님의 설명을 들으며 SF 소설 추천도 받았습니다. 익숙한 김초엽, 정세랑, 천선란, 김보영 작가부터 저에겐 낯설지만 SF계에선 유명한 작가들 책까지 소개 받은 뒤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3층은 앞서 말했듯 플라뇌즈 책방의 첫 정체성이 담긴 책이 모여 있어요. 큐레이션이 정말 기가 막힌데요. 도시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산책가들과 관련된 '플라뇌르' 섹션과 '플라뇌르'에서 파생된 '플라뇌즈' 섹션이 위아래로 나란히 있고, 사장님은 우리나라의 '플라뇌즈'를 떠올렸을 때 개화기 여성이 아닐까 싶었다며 개화기 여성이 등장하는 혹은 소재인 책을 큐레이션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플라뇌르가 도시에서 이미지를 수집하는 특징을 삼아 이미지와 관련된 책도 그 옆에 큐레이션 되어 있어요. 또 걷기와 관련된 책 코너가 있고, 걷기를 떠올렸을 때 행진이 연상되어 연대, 젠더, 장애를 소재로 한 책이 이어서 진열되어 있습니다.
3층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인드맵이에요. 멋진 큐레이션에 반해 이때 또 플라뇌즈에 놀러가야겠단 다짐을 했어요. 곧 김초엽 작가의 새 단편이 나온다고 하니 가야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책보냥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10가길 21
-목~일 13:00~19:00 (매주 월~수 정기 휴무)
-인스타그램
하로와 하동



숨은 하로 찾기
고양이 러버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이자 천국이며, 개미지옥인 곳이 성북동 골목길에 숨어 있어요. 한성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에 있지만 그 수고로움은 곧 커다란 보상으로 옵니다. 고양이를 테마로 한 한옥 서점답게 문턱을 넘으면 이곳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자리를 잡고 눈을 빛내고 있거든요. (너무 귀여워) 턱시도와 카오스 모두 사람에게 무심하지만 사람을 경계하진 않아요. 그래서 쓰다듬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을 맞추는 편이 더 좋습니다.
고양이 관련 책을 판매하는 서점인데, 잡화점에 더 가까운 느낌이에요. 마그넷이나 거울, 양말, 키링, 핀 버튼처럼 고양이가 그려져 있거나 수놓아진 소품 등 고양이의 모든 것이 있다고 봐도 무방해요. 그래서 고양이 러버는 더욱 지나칠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오면 고양이 서적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리고 곧 행복해집니다. 고양이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도 있어 책 구경하기에도 좋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요리조리 잘 다니지만 사람에게 곁은 내주지 않는 고양이의 사랑을 하염없이 갈구하다 보니 돌아갈 시간이 됐습니다. 고양이 핀 버튼을 구매하고 회사로 복귀하려는데 책보냥 사장님께서 제 카메라를 보시더니 알은체를 하셨어요. 사진작가이면서 화가인 사장님 눈에 미놀타 X700이 들어온 거예요. 덕분에 카메라와 고양이 사진 이야기를 잠깐 나눴습니다. 다음번에 방문하면 고양이 사진이랑 본인이 사용했던 렌즈를 보여주시기로 해 자연스럽게 다음 방문이 기약됐어요. 그때는 하동(턱시도), 하로(카오스)와 조금 더 친해지자는 소소한 목표도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고양이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주고 싶거든요.
위켄드필름 현상소
-서울시 성북구 창경궁로43길 36
-화~일 11:00~19:00 (매주 월 정기 휴무)
-인스타그램








필름, 커피, 음악
필름과 커피와 음악이 있는 곳답게 문을 열면 재즈가 가장 먼저 귓가에 울리고 그다음 원두 냄새가 찾아옵니다. 공간은 크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빈티지한 분위기인데, 마치 음악과 필름을 시각화할 수 있는 모든 요소로 공간을 만든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처음 방문했음에도 낯설기보단 친숙하고 아늑했어요.
커피를 주문한 뒤 실내를 구경했습니다. 필름, 음악이 각각 나누어져 있기보단 한데 어우러져 있어요. 판매하는 필름을 구경하다가 눈을 돌리면 책장 가득 CD가 꽂혀있고 CD 책장에서 살짝만 시선을 내리면 카메라가 소품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필름이 일정한 간격으로 수납된 테이블 위에 CD가 있길래 마시던 커피를 올려봤어요. 필름, 커피, 음악. 3요소가 비로소 모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스피커에서 재즈가 흘러나와 공명하기 때문에 필름을 맡기러, 커피를 마시러 가기에도 좋지만 음악을 듣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도 좋을 것 같았어요. 을지로 망우삼림이 홍콩 속 아는 사람들만 아는 작은 갤러리를 연상케 한다면 위켄드필름은 주류를 판매하진 않지만 스피크이지 바에 간다면 이런 분위기이지 않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이날 현상을 맡겼는데요. 컬러는 20~30분 만에 가능하지만 흑백은 약 3~4일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 참고하세요.
누앙스 미묘한 차이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로72길 7
-매일 10:00~24:00
-인스타그램





샹그리아
이름부터 독특한 누앙스 미묘한 차이는 감성과 여유를 모두 챙기고 싶을 때 가면 좋은 곳. 카페 겸 와인 바로 운영되는 곳이지만 오전부터 영업하며 가격대가 있는 편입니다. 특히 커피나 음료 가격대가 높아 오히려 와인처럼 주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보여요. 시그니처 음료 샹그리아를 주문한 뒤 마치 숲속 혹은 식물원 같은 내부를 구경하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꽃집(블레스유 플라워)도 함께 운영되는 곳이라 실내는 각종 식물로 가득한데 이미지만 보면 유아의 '숲의 아이'가 흘러나와야 할 것 같지만 재즈 음악도 잘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오히려 차분하고 묵직한 재즈 음악 덕에 이 공간이 더 멋들어지게 느껴져요. 많은 카페를 다녀봤지만 누앙스 미묘한 차이만이 낼 수 있는 확실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재즈 선율 사이로 꽃을 다듬는 가위 소리가 추임새처럼 들리고 식물과 목제 가구의 완벽한 조화,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한적한 골목을 보면서 샹그리아를 마시는데 이보다 더 여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어요. 특히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꽃가위 소리가 생각보다 더 심신 안정에 좋았어요. 이곳에 가면 가위 소리가 듣기 좋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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