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영화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즐기는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다가가기 어려운 부문이 있다. 바로 공포(Horror).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굳이 공포 영화를 고를 일은 거의 없지만 특이하게도 여름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온몸을 휩싸는 서늘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라 그럴까, 더위 대신 오싹함을 택하게 된다. '더위를 피하는 방법'이 뭐냐 묻는다면 공포 영화만 한 게 없다고 추천해 주고 싶다. 보고 있으면 닭살과 소름이 번갈아 돋고, 실내 온도가 몇 도쯤 내려간 것처럼 주변 공기가 차가워진 것만 같다. 다만, 귀신이 튀어나오고 뻔하고 진부한 공포물은 쉽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용기 내어 선택한 만큼 그에 걸맞은 신선한 공포를 기대하게 되는 법이니까.
나처럼 '계절성 공포' 를 찾는 이들을 위해 조금 다른 결의 공포 영화 세 편을 추천해 주고 싶다. 이번 글의 제목처럼 이 영화들에는 귀신은 없다. 대신 짓누르듯 조여오는 분위기와 기괴한 불안감과 긴장감이 있다. 음향이 핵심이기에 가능하다면 볼륨은 과감히 높이는 것을 추천한다. 이왕 보기로 마음먹었다면 제대로 몰입해 보는 건 어떨까.
<영화 관람 TIP>
1. 최대한 어둡게 보세요. 조금의 빛도 허락하지 마세요.
2. 소리는 크게 해 놓으세요. 놀랄 일은 어차피 생깁니다.
3. 주전부리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저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샤이닝(1980)>
- 등급 : 19세
- 러닝 타임 : 2H 26M
"All day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특유의 공포영화와는 다르게 너무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이 된 탓일까,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도대체 이게 뭐가 무섭다는 걸까 싶었다. 그저 고립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무너진 일상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영화가 중반을 넘기고 나서부터 마치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 숨죽인 채 누군가의 광기를 같이 지켜보는 사람이 된 것 같고, ‘오버룩' 호텔 이라는 공간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는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


출처 : IMDb
콜로라도의 한 외딴 호텔 '오버룩'. 겨울 동안 호텔을 관리하게 된 작가 '잭 토런스'와 그의 가족은 눈보라에 갇힌 채 세상과 단절된 긴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처음에는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호텔 어딘가에 잠재된 무언가가 조금씩 잭의 정신을 흔들기 시작한다. 타자기 앞에서 한 문장만을 반복하던 그는 점점 불안정해지고,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가족을 향하지 않게 된다.

출처 :IMDb
<샤이닝>은 공포를 보여주는 방법이 유독 더 공포스러웠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억울한 영혼의 귀신이 나오지 않는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주며 오버룩 호텔의 저주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눈으로 둘러쌓인 호텔 주변은 숨소리 하나 허락하지 않고, 아무도 없는 호텔 복도를 질주하는 대니의 자전거 소리, 문이 벌어지는 소리, 타자기 키보드가 눌리는 소리까지 이 모든 음향 효과는 다른 공포 영화가 가지고 있는 시각 효과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감을 느끼게 해준다.


출처: IMDb
그렇다고 시각적으로 시시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많은 영화가 오마주 했던 유명한 '피가 쏟아지는 엘리베이터' 장면, 섬뜩한 호텔의 색감, 문제의 237호실 모습 등 외에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주받은 오버룩 호텔의 모습은 두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소름 끼치는 음향과 기괴하고도 알 수 없는 장면들의 조합을 끊임없이 보여주는데, 차라리 귀신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든다. 이 여름, 진짜 서늘함이 필요하다면 오버룩 호텔의 문을 열어보길 바란다.

<유전(2018)>
- 등급 : 15세
- 러닝 타임 : 2H 7M
이 영화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그만큼 후유증도 꽤 오랫동안 있었는데, 예를 들어 한동안 어두운 방에 못들어 갔다거나, 누군가 입으로 "딱!" 소리를 내면 온몸이 굳어버렸다. 영화를 보고 여운이 남았던 적은 있지만 후유증이 생긴건 처음이었기에 말 그대로 서늘하다 못해 추워지는 영화다.

출처 : IMDb
<유전>은 미국의 오컬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가족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영화는 아주 천천히 사람을 무너뜨린다. 가족 구성원 하나씩 나타나는 문제점이 있고, 악마를 숭배하는 종교에 의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파괴되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흔히 겪는 가족의 비극처럼 보이지만 이 감정의 균열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있어서 멈출 수 없는 하나의 공포가 되어 보여준다. 가족 영화이지만 음산하며 특유의 불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출처 : IMDb
이 영화의 큰 특징은 인물의 표정을 원샷으로, 그것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미스테리한 배경음악과 잔뜩 일그러진 주인공들의 표정이 어우러져 꽤 충격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곳곳에 지뢰처럼 숨어있는 장면들 때문에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로 압도되고 공포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다른 공포 영화와는 다르게 다소 느린 호흡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장면 전환이나 인물들의 움직임이 정적이고 느린 편이라 루즈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영화에 몰입이 되는 순간 이런 느린 연출조차도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서서히 무언가가 진행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기 때문에.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미지
일단 나는 두 귀를 막고 오직 한눈으로만 봤다. 이럴 거면 왜 보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끝까지 보고 싶은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심리적 압박감을 주며 점점 도망갈 곳 없이 조여오지만, 계속 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 또한 영화의 묘미 아닐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미친 듯한 공포감에 지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영화 덕분에 이번 여름을 그리 덥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웬만한 공포 영화는 섭렵했다고 하는 분들에게 도전해 볼 영화로 추천한다.

<바바둑(2014)>
- 등급 : 15세
- 러닝 타임 : 1H 34M
BA BA DOOK,,, DOOK,,, DOOK,,,
공포 영화의 매력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불안,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 그리고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긴장감. 그런 의미에서 <바바둑>은 이 모든 요소를 절묘하게 갖춘 작품이다. 러닝타임은 90분으로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시간이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관람 후에도 오래도록 남는 무언가가 있다.

출처 : IMDb
<바바둑>의 공포는 낯선 괴물에서 시작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익숙한 일상 속에서 천천히 퍼져나간다. 영화는 싱글맘 '아멜리아'와 여섯 살 아들 '대니'의 고단한 일상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아멜리아는 대니에게 '바바둑'이라는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이후부터 대니는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바바둑이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며 하루하루 아멜리아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대니. 그리고 점차 그 불안은 아멜리아에게도 전염된다. 지속적인 불안감에 정신 분열까지 겪게 되는 아멜리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바바둑과 대면하기로 한다.

출처 : IMDb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공포를 시각적인 충격이 아니라 음향과 심리적 표현으로 풀어낸다는 점이다. 바바둑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고요함을 찢고 나오는 낮고 울리는 목소리, 들릴 듯 말 듯 한 발소리, 어디선가 다가오는 듯한 숨소리들이 우리를 조여올 뿐이다. 폐쇄된 공간과 어두운 조명, 불안정한 사운드, 그리고 주인공의 심리 상태가 극도로 불안해질수록 영화는 더욱 숨 막히게 압박 되어왔다. 처음에 밤에만 찾아오던 바바둑이 점차 모든 일상에서 보이기 시작하며 곳곳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은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다가온다.

출처 : IMDb
<바바둑>은 단순한 공포 영화가 아닌, 아멜리아의 '상실'과 '억눌린 감정'을 나타내는 영화다. 인간의 트라우마와 불안을 갉아 먹으며 점점 악랄해지는 바바둑은 죽은 남편에 대한 슬픔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아멜리아가 꾹꾹 눌러왔던 감정의 틈 사이로 파고든다. 이 영화는 그런 존재와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라고 이야기 하는것 같다. 당신의 마음속 어딘가에도, 이미 바바둑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들 바바둑을 조심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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