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은 유난히 걷기 좋은 계절이다. 한껏 기다렸던 계절인데, 막상 날이 빠른 속도로 추워지니 '가을이 이대로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바람은 살짝 차지만 불편하지 않을 만큼 기분 좋고, 길가엔 노랗고 붉은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며 낮 햇살 아래에서는 제법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진다.
가을 산책은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좋다. 익숙한 거리를 다시 걸으며, 그 속에서 미묘하게 달라진 풍경을 발견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삼각지의 가을을 즐길 수 있는 산책 코스를 추천한다.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49길 12
12:00 -18:00 (화-일 / 월요일 휴무)

금성출판사의 6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 《기록하는 사람들》이 KCS SEOUL에서 상설로 진행 중이다. 입장료는 무료라 언제든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다. 전시는 '책과 거울의 방', 'AI ROOM', '책의 미로' 이렇게 세 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과 거울의 방

AI ROOM
첫 번째 공간인 '책과 거울의 방'에 들어서면, 사방을 둘러싼 거울 속으로 빛과 책이 반사되며 장관을 만든다. 곳곳에 있는 거울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오랜 추억 속에 있던 책들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의 틈을 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공간 안에는 두 번째 전시 구역인 'AI ROOM'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금속 기둥 구조로 이루어진 공간은 차갑고 약간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긴다. 알록달록한 책이 가득한 '책과 거울의 방'과는 대조적으로, 마이크와 의자만 덩그러니 놓인 이곳에서는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과 출판에 대한 고민이 느껴졌다. 의자에 앉아 AI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만, 낯선 공기 탓에 선뜻 시도하지는 못했다.
책의 미로


마지막으로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책의 미로'는 금성출판사가 걸어온 60년의 시간을 거대한 설치물 형태로 재구성한 공간이다. 관람객은 책 사이를 걸으며 출판사의 발자취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단순히 '보는'전시가 아니라, '책 속을 직접 거니는' 경험이 인상 깊었다. 사실 처음에는 '금성출판사'라는 이름이 낯설었는데, 전시를 천천히 돌아보면서 어릴 적 교과서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고, 그 순간 반가운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기록을 다루는 전시지만 기억도 마주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49길 14
11:00 -22:00 (월-일)




KCS SEOUL에서 함께 운영하는 카페 흙(heulg)은 전시장 바로 옆에 있다. 겉에서 보면 창고를 개조한 듯 투박하지만, 내부는 묵직한 목재 형식의 인테리어와 따뜻한 조명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높은 층고와 넓게 트인 구조, 그리고 테이블 사이 간격도 넓어서 오랫동안 머물러도 좋은 공간같다. 공간 자체가 여유를 전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평일 오전의 카페는 조용했다. 원두를 갈고 있는 소리, 스팀이 올라오는 소리, 의자 소리 정도가 들린다. 사람의 대화가 적을수록 공간이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커피 한 잔을 오래 두고 있어도 빠르게 소모되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모든걸 잠시 멈추고 쉬어갈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54길 7 301호
13:00 -19:00 (화-일 / 월요일 휴무)





카페 흙을 나와 신호등을 건너면 '픽셀 퍼 인치(pixel per inch)'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기념품이나 장식용 물건을 판매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사용자가 자신의 취향과 기억을 직접 선택하고 남길 수 있는 도구들을 다루는 곳에 가깝다. 진열대에는 다양한 감도의 필름과 그에 따른 결과물들이 귀여운 미니 클립 형태로 놓여 있고, 그 옆으로는 필름 이미지를 활용한 수첩, 포스터, 키링 등 나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 귀여운 아이템들이 가득 있다.
또 공간 안쪽에는 셀프 촬영이 가능한 포토 부스가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컷 남기기 좋은 구조라, 소중한 순간을 바로 기록할 수 있다. 반대편에는 필름 현상 수거함과 안내문이 놓여있는데, 이곳은 충무로 현상소 '일삼오삼육'과 함께 운영되는 곳이라고 한다. 필요한 경우 이곳에서 바로 현상을 맡길 수 있어서 편리할 것 같다.



포토부스를 지나면 독립 출판물 전시대가 이어진다. 사진집, 소형 인쇄물, 짧은 텍스트 중심의 서적들이 놓여 있다. 표지와 제본 방식이 제각각이라 한 권씩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필름과 책이 나란히 놓인 장면은 가을을 천천히 즐기기에 잘 어울린다. 마음이 괜히 붕 뜨는 날이라면, 이곳에서 '찍고, 읽는' 방식으로 천천히 가라앉힐 수 있을 거다고 결론을 내려본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150
12:00 - 18:00 (월-토 / 일요일 휴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무인 독립 서점 '청안시(靑眼視)'. 방문 전 전화 예약이 필요하며, 예약금 1,000원을 결제하면 10분간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다. 이후에는 시간당 이용료가 발생하지만, 책을 구매하면 추가 요금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니, 미리 알아두고 방문하는 것도 좋다.
청안시는 크지 않은 서점이지만, 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꽤 차분하다. 마치 친구의 서재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랄까.
책장은 빽빽하지 않고,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만큼 가까이 놓여 있다. 주로 음악 관련 서적이 눈에 띄었고, 한쪽에는 '선물용 블라인드 책'이 자리하고 있다. 제목 대신 짧은 주제가 적힌 포장지에 감춰진 책들, 어떤 내용을 만나게 될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선물의 방향이 조금 달라진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같은 만큼의 호기심을 가진 셈이라 재미있는 선물이 될 것 같다.


책장 사이사이에 놓여 있는 따뜻하고 정갈하게 쓰여있는 문구를 읽다 보면, 사장님의 책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레 느껴진다. 서점의 온도는 책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평소보다 더 천천히, 즐겨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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