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운데 한라산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제주의 구획은 도시를 기준으로 예상하자니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닙니다. 제주도는 제주특별자치도로 바뀌고,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으로 나뉘던 행정구역은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바뀌며 승격과 통합, 그리고 다시 분리의 과정을 거친 것이 2006년이니 고작 20년이 되지 않았고, 제주에서 오래 거주한 분들의 인식에는 여전히 과거의 구획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제주시는 제주도의 북부 일대가 모두 행정 구역으로는 제주시가 되지만 흔히 통용되는 ‘제주시’의 구획은 제주시에서도 중앙부만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동보다는 원(구)도심이냐 신시가지냐로 나누기 시작하면 제주시의 개념은 보다 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국가에 준하는 개념을 가진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의 총합보다 넓을 만큼 동아시아에서 손꼽히게 큰 섬인 제주인지라 행정상의 구역 관리는 제대로 이루어졌지만 과거 기준과 현재 기준 사이에서 적응하는 일은 꽤 시간이 필요합니다.
 
 

 
 
‘해안동’은 제주시의 서쪽 끝자락, 애월읍이 시작하는 곳과 맞닿은 동네입니다. 신시가지로 불리며 번화한 노형동 지역과 유명한 관광지로써 유동 인구가 많은 애월읍 사이에 위치한 동네인데, 해안동은 그와 달리 조용합니다.
 
해안동은 구획상으로는 도심에 인접한 곳부터 한라산의 꼭대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지는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범위에 포함된 몇몇 오름을 제외하면 특별한 관광지가 없어 유동인구가 많지 않고 거주 지역이 넓은 것도 아니지만, 산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까지 시원하게 탁 트이는 전망이 무척 좋습니다.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위치까지 꽤 큰 규모의 카페들이 산개하고 있다는 점이 해안동의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스테이 위드 커피(Stay with Coffee)’도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해안동 북서쪽,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독특한 형태의 중정들과 여러 발코니로 이루어진 총 3층 규모, 꽤 거대한 단일 건축물 형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근처 귤 밭 앞에서 작업 복장을 한 주민들 몇몇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세련된 건축물과 대비를 이루며 새삼 정겹습니다.
 

 
 
내부로 들어서자 자리에는 사람들이 꽉 차있고, 한 쪽 벽면을 전부 차지하며 길게 늘어선 바 안에는 스태프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 반대쪽엔 손님은 들어갈 수는 없지만 유리창을 통해서 안을 볼 수 있도록 되어있는 로스팅 룸이 있습니다. 1층의 상당 부분은 바와 로스팅 룸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작업 공간 규모가 큽니다. 
 
 

 
 
로스팅 룸 안에는 메인 로스터와 소형 로스터, 그리고 샘플 로스터까지 총 세 대의 로스터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번쩍거리는 메인 로스터는 ‘프로밧(Probat)’의 12kg 로스터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로스터의 규격은 대체로 내부 탱크에 최대 몇 kg의 생두를 투입할 수 있냐를 기준으로 합니다. 12kg의 로스터는 매장에 두고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에 속합니다.
 
로스터는 최대 용량이 정해져 있다지만, 그렇다고 최대 용량으로 생두를 넣어 로스팅 하는 것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내부에서 생두가 회전하며 열을 골고루 흡수하기 위해선 탱크의 최대 용량만큼 생두가 가득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조건 대형 용량의 로스터를 사용하는 것도 권장되지 않습니다. 긴 시간의 예열과 후열, 그리고 로스팅에 사용되는 가스 소비량과 골고루 생두에 열을 입히기에 최적인 최저 용량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원두가 신선할 때 소비하기 적절한 양으로 볶아내기 위해선 로스터의 용량을 신중히 결정해야 합니다.
 

 
 
사실 12kg 로스터도 매장에서 사용하기엔 꽤 큽니다. 1kg 생두가 로스팅 되면 수분이 날아가 800g 남짓이 되고, 커피 한 잔을 위해서 대략 20g의 원두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40잔의 커피를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12kg 로스터에 10kg의 생두를 넣었을 때 8kg의 원두가 나온다고 계산하면 총 400명 분량의 원두가 만들어집니다. 로스터는 한 번 가동하면 준비와 예열, 후열의 효율성을 위해 여러 ‘배치(batch)’를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한 번에 생산되는 원두의 ‘상미 기간’까지 고려하면 일반 카페에서 그만한 양을 단기간에 소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생두 및 원두의 생산과 소비량은 계산하기 쉽게 단순 변환하였습니다).
 

 
 
스테이 위드 커피가 대형 카페라도 12kg 로스터의 생산량을 모두 소비하기란 쉽지 않은데, 로스팅 룸 앞 진열대에 빼곡히 놓인 종류별 원두와 한정을 둬야 할 만큼의 인원이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그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샘플 로스터로 적은 양의 생두를 활용하여 원두의 성향을 파악한 후, 12kg 로스터로는 소비량이 많은 원두(아마도 여러 품종을 섞은 블렌드 원두), 5kg 로스터로는 여러 종류의 생두를 조금씩 로스팅 하는 등의(아마도 단일 품종의 싱글 오리진) 효율적인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직접 로스팅을 하는 로스터리 카페의 특징은 신선하고 다양한 원두를 ‘브루잉(brewing)’으로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는 듯 하얀 머리를 질끈 묶은 진지한 표정의 주인장은 쉴 새 없이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인 주전자를 조심스레 기울여 커피를 내리고 있습니다. 핸드드립 커피는 사실 브루잉 커피를 일본에서 부르던 콩글리시인데, 주인장의 진지한 얼굴과 섬세한 손놀림은 누가 봐도 장인이 연상되는 터라 브루잉이란 단어보단 핸드드립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 앞에 앉아 잠시 주인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구경을 하고 있자니 원두 분쇄도와 물 온도를 신중히 확인해가며 커피를 내려냅니다. 브루잉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첫째 원두, 둘째는 원두 분쇄도, 셋째는 물 온도입니다. 원두에 물이 닿는 시간과 면적을 결정하는 것이 분쇄도이고, 원두에 담긴 커피 성분은 물 온도에 따라 다르게 녹아내리기에 중요합니다. 사실 보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줄기의 조절은 그다음 순위인지라 앞서 언급한 사항들을 바꿀 만큼의 힘은 없습니다.
 
원두 결정과 분쇄도 조절, 물 온도 조절은 마시는 이의 입장에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데이터와 숙련도를 축적해야만 가능한 영역입니다.
 

 
 
일반적인 기준보다 낮은 온도에서 원두를 길게 뽑아내는 것은 주인장만의 노하우처럼 보입니다. 
 
“이번 추출은 물 온도가 상당히 낮네요? 차갑게 마실 때 산미를 부각시키려고 그러나요?”라고 묻자 “그렇다기보단 지금 원두는 이 온도가 어울려요.”라고 대답하더니 로스팅 룸 앞에 커다랗게 붙은 알록달록한 그래프가 그려진 차트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나갑니다. “우린 원두마다의 특성을 누구나 쉽게 파악하고, 쉽게 맛을 상상할 수 있도록 색상 전문가와 컬러 차트를 만들었답니다. 지금 원두는 이 색상이에요(손가락으로 컬러를 가리키며).”라며 알려줍니다.
 
컬러 차트를 유심히 살펴보니 커피의 다양한 아로마와 맛에서 연상되는 색상을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코닉(Mahlkönig)’ dml EK43 그라인더를 두 대씩 두고 부지런히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니 브루잉 커피 전문점인 것 같지만, 뒤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은 범상치 않은 ‘라마르조꼬(La Marzocco)’의 ‘스트라다(Strada)’, 그것도 3그룹 모델입니다. 제주 대형 카페들이 관광지화(化)가 되면서 과시용으로 최고급 에스프레소 머신인 스트라다를 설치해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다만 이게 고급=고성능이란 공식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트라다가 고성능 머신임에는 분명하지만 커피를 추출하는 바리스타의 역량에 따라 섬세하게 조절을 해야지 본연의 성능을 내는 머신이고, 그렇게 섬세하게 조절이 되기 때문에 고성능 머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트라다와 같은 고급/고성능이지만 균일성과는 거리가 있는 머신은 뛰어난 역량을 지닌 바리스타가 다뤄야 본연의 성능을 끌어낼 수 있기에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를 무수히 봤습니다(특히 단기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스태프가 다루고 있다면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바 안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이곳은 주인장이 드립을 전담하고 있다면 에스프레소는 다른 바리스타가 전담하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면밀히 물줄기를 관찰하는 바리스타의 눈길은 날카롭고,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에 조심스레 우유를 얹어 라테를 만드는 모습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슬쩍 잔 위를 살펴보니 고운 우유 거품으로 완성된 섬세한 라테 아트가 멋집니다. 라테 아트의 실력이 커피 추출 실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랜 연습과 무수히 실패를 해야지만 완성 가능한 영역의 라테 아트를 하는 이가 에스프레소를 대충 뽑을 만큼 커피에 대한 애정이 없을 리는 없습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스트라다군요?”라고 짐짓 아는 척을 해보지만 “그냥 뭐 라테 용이죠.”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주인장의 말에서 에스프레소를 넣은 라테에 대한 자신과 바리스타에 대한 신뢰가 묻어납니다.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와 같은 화려한 원두부터 다양한 싱글 오리진 원두들로 브루잉한 커피를 맛볼 수도 있었지만 스테이 위드 커피의 이름을 건 시그니처 블렌드와 메뉴판 옆에 사진까지 붙여둔, 에스프레소와 우유 위에 크림을 얹은 크림 라테가 궁금합니다.
 
브루잉 커피는 꽃이 연상되는 향긋한 신맛에 산뜻한 쓴맛입니다. 커피를 목으로 넘기고 입에서 느껴지는 애프터 테이스트는 혀끝에 남는 껄끄러움 없이 무척이나 깔끔합니다. 바리스타 연령대가 어리면 화려한 신맛에 집중하고, 바리스타의 나이가 지긋하면 묵직한 쓴맛에 집중한다는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건만 이 커피는 밸런스가 무척 훌륭합니다(이는 단순 편견은 아니고, 연령대에 따라 각기 다른 커피 문화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트 크림 라테는 크림이 많이 달지 않습니다. 크림은 설탕이 많아질수록 단단해지는 경향이 있기에 대체로 크림이 올라간 커피는 달건만 스테이 위드 커피의 크림 라테는 크게 달지 않습니다.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딱 기분 좋게 감싸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길 만큼의 밸런스로 달콤함을 조절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즐거운 일요일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조용한 마을에 사람들이 굳이 발걸음을 할 만큼 훌륭한 밸런스입니다.    
 
· 스테이위드커피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마을5길 29
-영업 시간 : 매일 08:30 - 17:30
-연락처 : 0507-1375-5730
 
 
사용 장비 ㅣ 시그마 fp + 자이스 Milvus 35mm f/1.4
*이 컨텐츠의 디지털 이미지는 ‘Dehancer’ 필름 플러그인으로 효과를 낸 것이니 촬영 장비의 광학적 특성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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