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는 마실 것(대체로 커피)과 함께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쉴 수 있는 사랑받는 공간으로 존재의 의의를 갖습니다. 카페보다는 커피숍, 혹은 커피 전문점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카페는 커피를 프랑스어로 부르는 단어일뿐이지만 어쩐지 어감에서부터 글자 모양까지 친근합니다.
한국은 원두를 활용한 에스프레소와 브루잉 커피(흔히 핸드드립이라는 국적 불명의 단어로 불리곤 합니다)의 소비가 지금처럼 증가하기 전에는 대체로 동결 건조 커피를 선호하던 취향과 ‘다방’이란 형태의 커피를 제공하던 공간에서 대체로 커피를 소비하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커피의 소비처가 다방에서 원두를 활용해 에스프레소와 브루잉 커피를 제공하는 카페로 바뀌며 폭발적으로 원두 커피의 수요가 증가하고 소비층의 취향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는데요. 그만큼 자본이 순식간에 집적되면서 지금의 한국에서 카페는 상당수가 고자본의 관광지화가 이루어져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의가 다소 변질되어 버린 곳이 많습니다.
한국의 최대 휴양지인 제주에선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멋진 공간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커피맛과 혼잡한 분위기에 실망하고 발길을 돌리는 카페를 만나는 경우도 무척 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피 99.9’와 같이 정성들여 커피를 내리고,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개성있는 카페를 찾는 것은 제주에선 흔치 않은 소소한 즐거움이자 행운이죠. 커피 99.9는 제주시 방향에서 ‘1100 고지’로 향하는 길의 초입에 위치하는데, 입지가 독특해서 인구가 밀집한 행정구역에 속하면서도 고지대에 위치해 주위가 다소 한적해 단골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한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어쩐지 재미있습니다(둘의 차이는 눈썰미가 둔감한 사람일지라도 복장의 형태와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두리번거리는지 아닌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바 앞에 서서 슬쩍 안을 둘러보니 ‘라 마르조꼬(La Marzocco)’의 ‘GB/5’ 에스프레소 머신이 눈에 띕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그 카페를 판단하는 것이 아둔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스프레소 머신의 근간을 만든 라 마르조꼬의 에스프레소 머신인지라 짐짓 신뢰가 갑니다. 게다가 ‘GB/5’는 얼마 전에 타계한 라 마르조꼬의 최고 경영자이자 전설적인 기술자였던 ‘피에로 밤비(Piero Bambi)’가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인 지오바나 밤비(Giovanna Bambi)의 이름을 붙여 개발한 독립 보일러와 현대적인 온도 조절 기능을 갖춘 아름다운 에스프레소 머신입니다.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바리스타의 몫입니다. 원두의 선택과 세팅과 추출을 비롯한 모든 것은 바리스타이기에 고가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가지고도 실망스러운 커피를 추출하는 경우와 저가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가지고도 훌륭한 커피를 내리는 것도 결국 바리스타의 역량 차이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다른 지역보다 유독 고자본의 카페가 많은 제주에선 고급 에스프레소 머신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닌데, 방문객에 치여 멍한 눈으로 바 안을 표류하는 스태프들이 제공하는 커피에서 고심해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는 아주 빈번합니다. 그래도 멋진 에스프레소 머신은 어쩐지 커피맛에 대한 기대 심리를 높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의 한 켠에는 구형 애플 아이맥 컴퓨터를 멋스럽게 메뉴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가장 상단에 ‘구십구점구라떼’란 이름부터 본격적으로 시그니처 음료임을 내세우는 커피가 눈에 띕니다. 재미있어 보이는 몇몇 메뉴를 뒤로 하고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커피를 우선 주문하고 받아본 커피는 외관상 여느 아이스 라떼와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잘저어서 마시라는 이야기를 무시하고 빨대로 에스프레소와 섞이기 전의 우유를 조금 맛보니 자연스러운 달콤함과 눅진한 고소함이 느껴집니다. ‘직접 졸인 시럽이 들어간건가? 아니면 생크림이 조금 섞인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저어 마셔보니 에스프레소의 쓴맛과 신맛이 우유의 농밀한 바디감과 밸런스를 이루어 절묘한 아이스 라떼가 됩니다.
농축 우유입니다. 우유는 약 87%의 수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지방과 물이 어는 점과 녹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이용해 수분의 상당량을 제거하면 우유가 지닌 좋은 성분과 맛을 농축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이스 음료에만 적합한 방식이지만, 얼음이 다소 녹아도 희석된 맛이 덜하다는 것도 장점이죠.
다만 그만큼 손실율이 높고 번거로운 방식인데, 이 커피의 가격은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아서 살펴보니 다른 메뉴들의 가격도 저렴합니다. 제주의 물가와 관련해 갑론을박이 이루어지는 최근의 여론을 봤을 때, 이 카페를 소개해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사뭇 궁금합니다.




커피 한 모금에 카페인이 뇌를 자극하니 안개가 걷히는 듯 주위가 눈에 들어옵니다. 커피 99.9는 건물 전체를 쓰는 구조로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지않은 규모의 건물이라지만 한 채 모두를 쓰는 것에 불구하고 좌석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치 박물관처럼 카페의 곳곳을 빈티지 디자인 기기들로 가득 채워놨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소품이 아닌 기기라고 한 것은 멀쩡히 작동하고 때문입니다. 벽면에 걸린 1960년대 생산된 ‘브라운(Brawn)’사의 TS45, TG60 스피커는 여전히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보아 다른 기기들도 멀쩡히 작동할 것으로 보입니다. 빈티지 소품들을 저렴한 인테리어라 생각해 너저분하게 전시해둔 곳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닌데, 이 곳이 유독 특이한 것은 모든 앞서 언급한 스피커를 비롯한 빈티지 기기들이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자 브라운사의 디자인 부분을 이끌었던 ‘디터 람스(Dieter Rams)’가 디자인한 것들이란 사실입니다.
정직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도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그의 디자인은 현대 산업 디자인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는데, 유명 디자인 하우스에서나 볼법한 디터 람스 컬렉션을 그의 철학에 맞게 과하지 않게 가지런히 그가 디자인한 ‘비초에(Vitsoe)’ 선반 위에 진열해둔 모습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미니멀리즘 속의 호화란 상충되는 두 단어의 조합으로 느낄 수 있는 묘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저라면 컬렉션을 위해 들인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정성이 더 고생스러워 벌벌 떨며 애지중지했을 것 같은데, 손님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서 함께 공유해주는 주인장이 어쩐지 고맙습니다(그럼에 불구하고 심지어 노키즈존도 아닙니다). 고개를 돌려 지긋이 바를 쳐다보니 갑자기 몰려든 손님으로 주인장 내외가 바삐 움직이며 음료를 만들고 있습니다.
차가운 커피를 마셨건만 아까부터 반대편 테이블에서 마시고 있는 수박 주스처럼 보이는 음료가 무척 궁금합니다. 컵 위에 잔뜩 쌓아올린 자몽이 올라간 음료를 마실까 고민도 되는데, 연신 어디선가 큰 수박을 가져와 나르는 남자 주인장을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아까 마신 구십구점구 라떼도 그렇고, 다른 메뉴들도 그렇고 손이 여간 많이 가는 메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효율’을 논하며 ‘정성’을 배제한 것들에 ‘혁신’이라고 포장하는 것이 지겨웠던 마당에 정성을 들여 하나하나 음료를 만드는 주인장 내외의 모습이 즐겁습니다.

수박 주스는 갈린 씨앗 하나 씹히지 않아 텁텁함이 없고, 블렌더 안에서 무자비하게 갈아내기만 한 것이 아닌지 빨대에 걸리지 않게 부드러우면서도 어쩐지 수박 특유의 씹히는 질감이 남아있습니다. 빨간 수박 속살 색깔의 주스 위에는 얇게 채를 썰어 돌돌 말아 올려둔 초록색의 무언가가 청량한 느낌을 줍니다. 오이인지 수박껍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씹어보라고 넣은 것은 아닌 가니쉬일텐데, 굳이 이리 정성을 들여 주니 고맙다. 문득 그게 수박 껍질이었을지 오이였을지 씹어볼 것을 그랬다는 궁금증이 이제야 밀려옵니다.


수박 주스를 연신 마시며 여자 주인장에게 슬쩍 다가가 “디터 람스 컬렉션은 왜 이렇게 많은 거에요?”라고 물으니 “제가 원래 디자인을 하던 사람이거든요. 좋아해서 하나씩 모으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지금은 카페를 운영하느라 디자인에 손을 못대고 있는 상황인데, 아직도 항상 생각을 하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카페 군데군데에 놓여있던 제주의 풍경이 담긴 사진으로 만든 액자가 떠올라 “사진이 예사로워 보이진 않는데, 직접 찍으신건가봐요?”라고 물어보니 “우리 부부의 취미에요. 처음 만난 것도 사진 동호회에서 만났거든요.”라며 어깨를 움추리고 웃는 모습에서 두 주인장의 화목한 사이가 어쩐지 느껴집니다.
“근데 카페 이름은 왜 99.9인건가요?”라고 물으니 어깨를 살짝 움추리며 “제 이름이 순금이거든요. 그래서 순도가 높다고 남편이 지어준 별명이에요.”라고 대답해줍니다. 남자 주인장을 보니 설계자가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습니다. 카페 안의 모든 것들은 모두 주인장 부부의 이야기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수박 주스를 입 안으로 쭉 빨아들이니 ‘어이쿠, 오늘은 어쩐지 달달함 과다군요.’
*[제주 카페 기행] 뜨거운 여름 차가운 커피와 휴식이 필요해 Y.A.H Coffee (바로가기)
사용 제품 l 시그마 fp+자이스 Otus 55mm f/1.4, Millvus 35mm f/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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