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은 오랫동안 기억된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등 우린 수없이 많은 처음을 겪게 된다. 첫 번째가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는 처음일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특권 같은 게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다음부턴 무뎌질 처음이라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게 싫었든 좋았든.
2023년 겨울, 처음으로 필름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필름의 세계를 열어준 나의 첫 번째 필름은 바로 HARMAN의 [PHOENIX 200]이었다. 디지털카메라는 넉넉한 용량의 메모리 카드만 있다면 내가 원하는 대상을 내가 원하는 구도로 몇 백, 몇 천장을 찍을 수 있다. 한마디로 실패 확률이 매우 적다. 디지털에 길들여진 나에게 피닉스 200은 설렘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한 장 한 장 정성 들여 찍은 결과물을 만나보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길던지, 그 기다림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디지털 뽕에 차있던 나에게 이 필름은 예측할 수 없는 톤, 노이즈를 연상케하는 빈티지함, 이름값을 증명하듯 사진을 뒤덮는 붉은 색감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실패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좌절의 순간도, 기다림의 순간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는 이 필름이 나의 첫 번째이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후속작인 [PHOENIX 200 Ⅱ]가 출시되었다. HARMAN은 피닉스 2가 전작의 개선된 버전이 아닌 완전히 다른 버전의 필름이라고 설명한다. 다음이라 무뎌질 내 기억과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들려온 좋은 소식이다. 푸른 불사조가 되어 돌아온 피닉스 필름은 나에게 또 어떠한 기억과 감정을 가져다줄까.

"····, yet still offers a different look and feel to mainstream colour films
and should still be considered a creative, experimental film."
- HARMAN PHOTO, 2025
HARMAN에 따르면, PHOENIX Ⅱ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컬러 필름과는 다른,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필름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피닉스 2는 완성형 필름이 아닌 여전히 개발 단계에 있는 필름이라는 것이다. 하만은 사용자의 경험과 피드백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인다. 필름 패키지 내부에 사용자들이 필름 쓰고 나서 느낀 경험과 피드백을 전송할 수 있는 QR 코드가 삽입되어 있을 정도다. 그렇게 하나 둘 쌓인 사용자들의 경험은 [HARMAN PHOENIX 200Ⅱ]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전작에 비해 가장 눈에 띄게 개선된 부분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부분에서 눈에 띄는 개선을 이뤄냈다. 지금부터 어떤 점이 개선되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정확해진 색 표현
PHOENIX 200 Ⅰ
PHOENIX 200 Ⅰ
피닉스 1은 출시 당시 예측불가한 필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대낮에 찍은 사진은 마치 해질 녘에 찍은 듯 붉은 노을이 뒤덮고, 해 질 녘의 하늘은 보랗게 표현되었다. 사진마다 들쑥날쑥한 톤을 보고 느꼈던 아찔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거듭된 개선 끝에 어느 정도 색 표현이 안정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채도가 강하고 특히 그중에서 빨간색과 주황색이 과하게 표현된다.

왼쪽부터 PHOENIX 200 Ⅰ & Ⅱ
피닉스 2로 넘어오면서 그 편견을 완전히 깨버렸다. 전작에 비해 색 표현이 정확해졌으며, 균일한 톤을 보여준다. 노란색과 녹색이 약간 강조되어 따뜻한 톤이 사진을 감싸며, 전체적으로 R/G/B가 조화롭게 표현된다. 실제로 하만에서 제공한 필름별 스펙트럼 감도 곡선을 비교한 표(X축=빛의 파장, Y축=상대 감도)를 보면, 각 필름이 R/G/B의 빛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다.
피닉스 1의 경우, 각 색상별 구간에서 곡선이 두 개의 몽우리가 지거나(B) 날카롭게 솟아있는걸(G, R)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과장된 색 표현을 의미하며 색 왜곡으로 인한 인공적인 느낌을 야기한다. 반면 피닉스 2의 경우, 색상별 구간에서 모두 균형감 있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R/G/B 모두 자연스럽게 억제된 색조 재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HARMAN에서 제공한 필름별 스펙트럼 감도 곡선 비교 자료
향상된 콘트라스트
PHOENIX 200 Ⅰ
PHOENIX 200 Ⅱ
콘트라스트 역시 크게 향상되었다. 피닉스 1의 경우, 콘트라스트가 강해 명암부의 디테일이 쉽게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밝은 부분은 아주 밝게, 어두운 부분은 아주 어둡게 표현되다 보니 시각적으로 강렬한 사진을 남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나 그만큼 사진의 입체감, 질감 등이 떨어져 평면적인 사진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피닉스 2로 넘어오면서 이 부분 역시 개선되었는데, 위의 비교 사진을 통해 확인해 보자. 두 사진은 필름을 제외하고 모두 동일한 촬영 조건(조리개값, 셔터스피드, ISO 등)에서 촬영한 결과물이다. 담 넘어 위치한 주택의 옥상(명)과 피사체 뒤에 가려진 나뭇가지(암)의 디테일이 살아나면서 사진의 공간감과 입체감이 더해져 사진이 더욱 풍부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미세해진 입자감과 선명도
왼쪽부터 PHOENIX 200 Ⅰ & Ⅱ
HARMAN에서 제공한 제품별 입자감 비교 자료
선명도 역시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선명도가 향상되기 위해선 몇 가지 선행 조건이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고운 입자감이다. 일반적으로 필름에서 입자가 작고 고르게 분포한다면 선명도가 높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입자감이 너무 약해진다면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듯한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순 있지만 필름 특유의 감성을 느낄 순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름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사진은 '적당한 입자감이 느껴지면서도 적당히 선명한 사진'이다.
PHOENIX 200 Ⅱ
피닉스 2는 전작에 비해 입자감이 확실히 개선되었다. 피닉스 1을 사용했을 때 아쉬웠던 부분 중 하나는 마치 노이즈가 낀 듯한 거친 입자감이었는데, 2로 넘어오면서 입자감이 미세해지고 부드러워졌다. 피닉스 1은 거칠고 굵직한 입자감으로 사진이 조금 뭉개져 보이고 디테일이 떨어져 보였지만 피닉스 2는 확실히 전보다 세밀하고 부드러워져 사진의 선명도가 전체적으로 높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피닉스 2의 그레인이 굉장히 미세해졌는가? 사실 그건 아니다. 전보단 확실히 고르게 퍼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여전히 거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필름 특유의 유기적 질감을 살린 빈티지한 사진을 원한다면 이 필름은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시네마틱 무드
PHOENIX 200 Ⅱ
PHOENIX 200 Ⅱ
PHOENIX 200 Ⅱ
필름에 영화 같은 분위기를 얹고 싶다면, 피닉스 2가 그 해답이 될 것이다. 필름 사진에 영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시네스틸류 필름이 아니고서야 그 분위기를 담아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시네스틸 필름은 그 목적 자체가 영화의 감성을 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필름이라면, 피닉스 2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영화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노란색과 녹색이 약간 강조된 따뜻한 색감, 향상된 콘트라스트로 인한 입체감, 자연스럽게 억제된 색조 표현, 미세한 입자감 마지막으로 전작에 비해 은은해진 *블룸(Bloom)까지. 이것들이 한 데 모여 과하지 않은, 잔잔한 영화의 느낌을 만들어 낸다.
*블룸: 빛이 번져 보이는 현상
PHOENIX 200 Ⅱ
"This was just the beginning."
- HARMAN PHOTO, 2025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충분히 사용 가능할 정도로 모든 부분에서 업그레이드되었지만 여전히 HARMAN은 [PHOENIX 200 Ⅱ]를 완벽히 정제된 필름이 아닌 실험적인 필름이라 부른다. 사용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계속해서 더 나은 필름을 만들어 내겠다는 포부가 담겨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과연 우리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피닉스 2를 사용하고 나서 한 가지 확실한 건 점점 완성형 필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나 드라마는 재미없을 수 있지만, 진정한 명작은 그 끝을 알고 봐도 재밌는 작품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피닉스는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기대가 되는 필름이다. 그 끝은 아무래도 우리 모두가 보고 싶은 미래의 컬러 필름이지 않을까.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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